<33>당장 ‘바둑의 날’ 시상자도 없어…컨트롤타워 실종, 역대 최대 위기
‘잔칫날’을 앞둔 한국 바둑계가 초상집 분위기다. 야심 차게 추진됐던 ‘바둑의 날’ 이 올해부터 첫 법정 기념일(11월5일)로 제정됐지만 정작 바둑계 내부는 사분오열된 양상이다. 최근 바둑계 컨트롤타워인 한국기원 수뇌부의 총사태가 빚어진 데다, 프로바둑기사회 회장 해임안 등을 골자로 한 임시총회까지 열리면서 내부 갈등은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이에 대해 한국기원에선 5일 이사회를 열고 대책 마련에 나설 방침이지만 묘수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 총체적 난국의 시발점은 ‘미투’ 사태
한국기원은 2일 홍석현 총재와 송필호, 송광수 부총재가 2일 사퇴했다고 밝혔다. 홍 총재는 “바라던 성과를 적잖이 이룬 이 시점이 자리를 비울 때라고 판단했다”고 중도 사퇴 이유를 전했다. 이어 △시니어ㆍ여자프로바둑리그 기전 창설 △바둑 관련 정부 예산 확대에 따른 바둑 보급과 교육아카데미 설립 활성화 △바둑TV 인수 △소년체전 및 전국체전에 바둑 정식 종목 채택 등을 성과로 꼽았다. 당초 지난 2014년 허동수 전 총재에게 바톤을 넘겨 받은 홍 총재는 당초 2020년 7월까지 임기가 예정돼 있었다.
구체적인 배경을 밝히진 않았지만 홍 총재 사퇴 발단은 결국 최근 불거졌던 김성룡(42) 9단의 ‘미투’ 사태에서 비롯됐다는 게 바둑계 안팎의 공공연한 사실이다. 한국기원의 미투 처리 과정과 관련, 프로바둑기사들의 불만은 고조됐다. 이 가운데 바둑계 원로인 노영하(67) 9단은 홍 총재에게 현재 한국기원을 중심으로 한 바둑계 문제점을 조목조목 나열한 공개서한까지 전달하면서 논쟁에 기름을 부었다. 급기야 최근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 앞에선 집행부 사퇴를 촉구한 일반 바둑팬들과 프로바둑 기사들의 피켓 시위도 벌어졌다. 이어 현 손근기(31) 회장 및 유창혁(52) 한국기원 사무총장의 해임 건의안 등을 놓고 찬ㆍ반투표도 실시됐다. 손 회장에 대해선 부결 처리됐지만 자신의 해임 건의안 가결을 확인한 유 총장은 지난달 31일 한국기원에 사표를 제출했다.
◇ ‘바둑의 날’ 수상자는 있는데, 시상자 없어…풀어야 할 난제 쌓여
발등에 불도 떨어졌다. 당장 5일로 예정된 ‘바둑의 날’ 행사에서 수상자에게 트로피를 건네 줄 시상자가 없는 상태다. ‘바둑진흥법’ 7조에 따라 법정기념일로 정해진 이날 행사에선 한국 바둑을 빛낸 6명의 기사에게 ‘국수(國手)’로 추대하는 한편, 바둑 발전에 기여한 인사들에게 표창도 수여할 계획이었지만 차질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국내 바둑계 간판으로 알려진 조훈현 자유한국당 의원이 발의한 바둑진흥법은 지난 3월말 국회 본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미투 사태와 관련, 여전히 불씨가 남았다는 점은 더 큰 난제다. 한 중견 프로바둑 기사는 “미투 사태가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고선 어떤 형태로든 대립과 충돌은 계속될 것”이라며 “5일 열릴 이사회에서 비상대책 위원회가 만들어 진다고 들었는데 이 문제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진짜 위기는 앞으로 닥쳐올 현실에서 확인될 것이란 우려도 내놓고 있다. 사실, 현재 국내 프로바둑계는 최악이다. 현재 종합기전은 KB바둑리그와 GS칼텍스배, KBS바둑왕전, JTBC 챌린지배, 용성전 등에 불과하다. 1990년대 중반, 15개까지 열렸던 때와 비교하면 큰 차이다. 이 가운데 JTBC 챌린지배는 홍 총재가 취임하면서 신설된 기전이어서 폐지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세계 최대 기전 중 하나인 중앙일보와 KBS 주최의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선수권대회 역시 지속을 장담하긴 어렵게 됐다. 홍 총재는 지난해 3월까지 중앙일보와 JTBC 회장을 역임했다. 손근기 한국프로바둑기사회 회장은 “현재 한국 프로바둑계는 당장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역대 최대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게 사실이다”며 “당면한 상황에 대해 이사회에서 해법을 찾아보겠지만 어려운 게 현실이다”고 토로했다.
허재경 기자 rick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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