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세훈 전 국정원장 재판을 고의 지연시켰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고등법원 부장판사(차관급)가 법원 내부망에 자신의 의혹과 관련한 항변을 잇달아 올리면서, 법원 내부가 시끄럽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게 무슨 문제냐는 옹호론이 나오는 반면, 동료 법관에게 미리 심증을 형성하게 하는 위험한 행위라는 지적도 많다.
2일 법조계에 따르면 김시철(53ㆍ사법연수원 19기)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전날 내부전산망에 ‘원세훈 항소심은 외부 개입 없이 공정하게 진행됐다’는 취지의 글을 올렸다.
김 부장판사는 2015년 7월 대법원에서 “증거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취지로 파기환송된 원 전 원장 재판(2012년 대선 개입)을 맡았지만, 1년 8개월간 결론을 내리지 않고 다른 재판부로 옮겨가 ‘고의 지연’ 의혹을 사 왔다. 당시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원세훈 사건 환송 후 심리방향’ 문건에서 행정처가 재판부 동향을 파악하려 했던 사실이 최근 공개되면서 김 부장판사의 지연이 행정처 가이드라인에 따른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샀다.
이에 대해 김 부장판사는 “문건 작성자ㆍ작성 경위ㆍ내용 등을 전혀 알지 못했고, 문건 작성이 내 업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했다”며 “당시 통상 업무방식에 따라 처리했다”고 주장했다. 김 부장판사는 A4 용지 48쪽에 이르는 글 중 25쪽을 의혹 부인에 할애했다. 그는 지난달 30일에도 내부전산망에 글을 올려 본인 의혹과 관련한 검찰의 압수수색의 불법성을 지적하며 비판했다.
의혹 당사자가 잇달아 자기 처지를 해명하는 글을 올리자, 일부 후배 판사들은 김 부장판사 처사를 지적했다. 박노수(52ㆍ연수원 31기) 전주지법 남원지원장은 덧글에서 “수사 중인 사안 관련자가 수사절차 밖에 있는 법원 구성원들을 향해 ‘혐의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일방적 주장을 미리 전한 것은 그 자체로 매우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지난달 30일 김 부장판사가 자신의 이메일 압수수색과 관련해 검찰을 비판한 글에 대해서도 박 지원장은 “(김 부장판사 글에) 압수수색 영장의 수색 대상이 제대로 나타나 있지 않다”며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박 지원장은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김 부장판사의 글을 읽는) 법원 사람들은 장차 해당 사건이 기소되면 재판을 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라며 “이들을 대상으로 향후 재판에서 다툴 사안을 미리 주장하는 것은 예단과 편견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일반 국민이 억울하다 해서 판사들에게 이런 방식으로 직접 호소할 수 없듯, 법관 또한 이런 행위는 지양해야 한다”고 형평성을 문제삼았다. 또 다른 중견법관은 “김 부장판사가 이 글과 별도로 내부전산망에 잘 접속하지 않는 이들을 향해 전체 메일도 보냈다”며 “일부 판사들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해 아예 열지도 않고 지운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최근 검찰의 밤샘수사나 압수수색 문제점을 지적하는 고위법관들의 내부망 글이 이어지는 현상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도 있다. 서울의 한 지법 판사는 “수십 년간 수많은 재판을 했을 텐데 그때는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이러는 건 언론과 내부 판사들을 상대로 여론전을 펼치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한편에선 의혹을 받고 있는 개인으로서 충분히 펼칠 수 있는 반론이라는 지적도 만만치는 않다. 수도권 지법 한 부장판사는 “압수수색, 밤샘조사 등은 어느 시점에서건 논의가 필요한 사안은 맞다”며 “본인이 직접 당해보니 심각함을 느꼈다는 얘기를 용기 있게 지적한 것을 비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서울지역 한 판사 역시 “다 지나간 다음 지적하면 뒷북이라고 비판할 것 아니냐”며 “공론화가 필요한 부분도 분명 있는 만큼 무조건 비난할 게 아니다”고 강조했다.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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