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속 경찰 등이 가해자… ‘조직의 쓴맛’ 공포감에 권력 요구 순응 불가피”
北, 재외공관 통해 반발… “한반도 화해ㆍ협력 불편 느낀 적대세력이 날조”
2014년 탈북한 40대 오정희(가명)씨는 양강도에서 장사를 했다. 혜산시에 있는 장마당(시장)에서 옷을 팔았고 도 지역에 직물을 유통하기도 했다. 오씨 증언에 따르면 당시 단속원이 정기적으로 시장을 돌아다니며 뇌물을 요구했고 때로는 성행위를 강요했다.
“여러 번 (성폭행) 피해를 당했습니다. 장마당 단속원이나 보안원(경찰)은 내키는 대로 장마당 밖 빈방 같은 곳으로 따라 오라고 합니다. 어쩔 수 없지요. 우리를 (성)노리개로 생각하니까.”
오씨는 폭력에 맞서거나 이를 신고한다거나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저 상황을 모면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여겼다고 한다.
“번잡한 곳이면 언제인지 모르게 남자의 손이나 몸이 가슴ㆍ등 같은 곳에 닿아 있습니다. 그래도 보복이 무서워 모른 척하고 지나갔지요.”
당할 때는 자기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북에서는) 그런 일(성폭력)이 워낙 흔해 아무도 그걸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폭행하는 남자들은 그게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고 우리(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화가 나는 줄도 몰라요. 하지만 인간이니까 느끼죠. 어떤 때는 갑자기 이유 없이 밤에 눈물이 나요.”
최근 국제 인권 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가 발간한 북한 성폭력 실태 보고서 ‘이유 없이 밤에 눈물이 나요’에 실린 사례다. HRW는 1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보고서 내용을 공개했다.
HRW가 2015년 1월부터 올 7월까지 3년 6개월 간 2011년 이후 탈북한 57명 등 북한 밖의 북한인 106명과 진행한 인터뷰를 토대로 작성된 이 보고서는 “북한에는 정부 관리들에 의한 여성 성폭력이 만연해 있지만 사회적 낙인과 두려움, 구제책의 부재 탓에 신고ㆍ처벌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계획경제 체제인 북한에서는 장사가 불법이지만 1990년대 대기근이 닥친 뒤 생계가 어려워진 주민들이 장사에 나섰다. 이들 중 상당수는 국영 작업장에 나갈 필요가 없는 기혼 여성이었다.
2002년 북한 정부가 장마당을 허용하면서 북한의 마을ㆍ도시에 식품ㆍ공산품을 파는 장마당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법적 경계가 모호하다. 뭐가 허용되는지 여부가 특정 상황이나 담당 관리의 판단에 따라 달리 해석될 여지가 있고, 이런 규칙ㆍ규정 부재가 여성들을 폭력ㆍ착취에 노출시킨다.
보고서는 “장마당에서 장사하는 이들 대부분이 여성인 반면 관리자ㆍ단속원은 대부분 남자”라며 “장사꾼들이 장사를 하려면 정부 관리와 시장 간부들에게 뇌물을 줘야 할 때가 많은데 여성의 경우에는 뇌물에 성폭행이 포함될 수 있다”고 전했다.
HRW의 인터뷰 대상 중 북한에서 장사를 한 경험이 있는 여성 21명은 보안원 등 관리들로부터 성폭행ㆍ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관리들은 장마당의 위협적인 환경과 처벌의 부재, 수치심과 처벌에 대한 피해자의 두려움을 악용한다”고 보고서는 분석했다. 성폭력 가해자로는 고위 당 간부, 구금 시설의 감시원ㆍ심문관, 보안성ㆍ보위성(비밀경찰) 관리, 검사, 군인 등이 꼽혔다.
HRW는 사회적 낙인과 보복에 대한 두려움, 구제책의 부재 등 탓에 피해를 신고하는 여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더불어 뿌리 깊은 남녀 불평등과 성교육 및 성폭력에 대한 인식 부재가 은폐를 부추긴다고 설명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배석한 탈북민 출신 북한 인권 활동가 이소연 뉴코리아여성연합 대표는 “장마당 여성을 따로 불러 편하게 장사하도록 해주겠다며 성상납을 요구하는 보안원 등 관리가 북한에 흔하지만, 행정ㆍ정치ㆍ사법 부문 곳곳에 포진돼 권력을 갖고 있는 남성 간부들이 조직 이름으로 공포감을 먼저 주기 때문에 여성들은 체념 속에 요구를 순순히 들어주고 마음 편히 하고 싶은 일 하자는 생각을 하게 마련”이라고 폭로했다.
그는 “북한에서 군생활을 할 당시 부대에 재판관이라는 사람이 나와 여군 30여명을 조사했고, 그 중 3명이 군 간부들과 ‘놀아났다’는 죄목으로 불명예 제대하는 일이 있었다”며 “가해자가 아닌 성폭력 피해 여성들만 처벌을 받은 것”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이 대표는 “내가 북한에서 나온 지 10년이 지났지만 이런 여성 인권 침해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며 “북한 당국이 의지를 갖고 대책을 세우기 전에는 절대 근절될 수 없는 문제”라고 비판했다.
케네스 로스 HRW 사무총장은 “북한에서 성폭력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대응하지 않고 널리 용인되는 비밀”이라며 “북한 여성들도 어떤 식으로든 사법적으로 대응할 방법이 있다면 ‘미투’(me tooㆍ나도 당했다)라고 말하겠지만 김정은 독재 정권 하에서는 그들의 목소리가 침묵 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과의 대화 우선순위에서 비핵화에 인권 문제가 밀리고 있는데, 주민들의 교육과 보건, 주거 등에 쓰여야 할 자금이 핵 개발 프로그램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만큼 비핵화와 인권을 따로 떨어뜨릴 수 없다”며 “인권 존중이 비핵화로 나아가는 솔루션”이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로스 사무총장은 2일 국가인권위원회를 방문하고 북한 인권 문제 등을 논의할 계획이다.
HRW의 보고서 공개에 북한은 재외 공관 성명으로 반발했다. 1일(현지시간) 영국 로이터통신 보도에 따르면 스위스 제네바 주재 북한 대표부는 해당 통신에 전한 입장을 통해 “한반도에서 이뤄지는 평화와 화해, 번영, 협력을 불편하게 느끼는 적대세력의 헛된 노력”이라며 “근거 없고 날조된 이야기로 이른바 우리의 인권 문제를 제기해 화해를 막으려 하고 있다”고 항의했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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