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명확히 판단 안 해… 파기환송심 기준 땐 20만명 청구권 사라져
대법원이 13년 만에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손을 들어줬지만,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되는 시점을 언제로 볼 지 판단하지 않아 아직 소송을 내지 않았던 피해자의 구제 여부가 불투명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앞으로 제기될 추가 소송 과정에서 결국 대법원이 다시 한 번 판단을 내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은 지난달 30일 강제징용 소송 재판에서 “반인도적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은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해 소멸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지만, 권리(손해배상 청구권)행사 가능 기간이나 소멸 시효 부분을 명확히 하지 않아 강제징용 관련 개별 재판에서 혼선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즉,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에 승소한 피해자 4명과 이미 일제 전범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14건의 재판 당사자 외에는 손해배상 청구 권리가 있는지 여부부터 다퉈야 한다는 의미다. 대법원 관계자는 1일 “앞으로 강제징용 관련 소송이 제기되면 일선 법원에서부터 새롭게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법상으론 고의 또는 과실로 인한 위법행위로 타인으로부터 손해를 당한 피해자나 그 법정대리인은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간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그 권리가 소멸한다. 이에 따라 기산점(청구권 소송 가능 시점)을 이번 재판이 확정된 ‘2018년 10월’로 볼지, 앞서 같은 취지로 판단한 ‘2012년 5월’ 대법원 파기환송심 날짜로 볼지가 논란이 될 전망이다. 이번 재판 확정일을 기산점으로 볼 경우 피해자 권리가 구제될 수 있어 문제가 없지만, 2012년 5월로 볼 경우 소멸 시효가 지나 많게는 20만명에 가까운 피해자들은 소송을 제기할 권리가 사라지게 된다. 한 지방법원 판사는 “소송이 제기된 일본 기업들이 기산점을 두고 다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대법원이 지난번 강제징용 소송에서 손해배상 청구권 소송 소멸 시효 부분을 다루지 않은 건 민사재판 성격상 소송 당사자들이 쟁점으로 주장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선 재판부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손해배상청구권 기산점은 사법농단 수사와도 연관돼 있다. 검찰이 최근 수사에서 확보한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와 박근혜 정부 청와대의 재판거래 의혹 관련 문건에 따르면 법원행정처는 2012년 5월 파기환송심 이후 서울고법이 피해자 1명당 1억원 배상 판결을 내린 데 대해 강제징용 피해자로 추산되는 20만명에게 모두 20조원을 지급해야 한다고 우려했다. 따라서 서울고법에 대한 최종 대법원 판단을 청구권 소멸시효가 만료되는 2015년 5월 이후로 미뤄야 한다고 판단하는 내용이 있다. 검찰은 이 대외비 문건들을 재판거래의 주요 증거로 보고 있다. 한 검찰 출신 변호사는 “법원행정처가 우리 국민의 권리보다 박근혜 청와대와 거래를 위해 재판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안아람 기자 onesho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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