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자치 '방사모로 기본법'
내년 1월 주민투표 앞두고
남서부 술루 군도 주지사가
일시금지명령 신청 등 잡음
지난달 29일 필리핀 언론은 이 나라 남서부 끝자락 술루 군도의 주지사 압두사쿠르 탄 2세가 최근 현지의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인 ‘방사모로 기본법(Bangsamoro Organic Law, 이하 BOL)’ 일부 조항이 헌법에 반한다며 대법원에 일시금지명령을 신청한 사실을 일제히 보도했다. 지난달 11일 제출한 것으로 알려진 이 청원은 내년 1월21일 찬반 주민투표를 앞두고 있는 BOL의 앞날이 순탄치 않을 수 있음을 보여줬다.
BOL은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의 자치 지역을 확장하고 자치 수준도 대폭 강화함으로써 50년에 걸친 무장 분쟁을 종식시키는 구체적 발판이 될 수 있다는 기대를 받는 법이다. 이 법에 따르면 필리핀 남부의 기존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구역(ARMM)’은 해체된다. 대신 ARMM에 속한 5개 지방(술루 포함)과 2001년 ARMM 확장 찬반투표가 시행됐던 시ㆍ마을 등까지 포함시킨 더 넓은 영토를 ‘방사모로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구역(BARMM)’으로 묶게 된다. 탄 지사의 문제 제기는 BOL이 ARMM의 5개 지방을 한 선거구로 간주하고 있는 데에서 비롯됐다. 술루 군도가 이 법에 반대한다 해도 ARMM 전체에서 찬성이 우세하면 술루 군도도 BARMM에 통합돼 버리는데, 이는 결국 ARMM의 구성과 체제를 각각 정한 현행 헌법 10장 15조와 18조에 어긋난다는 지적이었다. 그는 이 법의 통과를 적극 추진 중인 필리핀 최대 반군 ‘모로이슬람해방전선(MILF)’을 맹비난했다. 이에 MILF는 지난달 30일 성명을 내고 “BOL은 17년간 평화협상의 결실이자, 4년간 방사모로 내 다양한 주체들과 탁월한 법 전문가들의 지난한 노력이 낳은 산물”이라고 반박했다. 남부 지역 내 갈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탄 지사의 반대에도 불구, BOL은 유엔과 유럽연합(EU), 미국, 일본 등으로부터 “환영한다”, “획기적이다” 등과 같은 평가를 받았다. 분쟁 종식을 고대하는 필리핀 시민들의 조바심 섞인 희망은 두말할 것도 없다. BARMM은 선출직을 포함한 의원 80명으로 자체 의회를 구성하고, 의회는 주지사를 선출할 예정이다. 그리고 주지사는 자치정부 내각의 장관들을 임명해 정부를 구성한다. 사법부는 샤리아 법정을 기본으로 하되, 소송의 한 당사자라도 무슬림이 아닐 경우엔 일반 법정을 도입할 수 있다.
BOL의 모멘텀은 2014년 3월 베니그노 아키노 3세 당시 행정부와 MILF가 역사적인 평화협정에 서명하면서 마련됐다. 이후 ‘방사모로 기본법’이 기안됐지만, 아키노 3세 정부하에선 의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Bangsamoro Organic Law’로 이름이 바뀐 뒤인 올해 7월23일 의회에서 최종 승인된 것이다. 그리고 사흘 만에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서명을 받아 속도감도 붙었다. 이제 내년 1월 21일 해당 지역 주민들의 찬반 투표만 남은 상태다.
BOL을 향한 적극적 움직임은 아이러니하게도 지난해 5월 민다나오의 도시 마라위를 장악한 뒤 정부군과 5개월간 교전을 벌인 이슬람국가(IS) 추종 ‘마우테그룹’이 추동한 면이 있다. 이른바 ‘마우테형제들’로도 불리는 이 극단주의 무장단체의 마라위 장악은 사상자 약 3,000명, 피란민 35만여명이라는 결과를 낳았고 이슬람 문화유산으로 유명했던 도시 전체는 잿더미가 됐다. MILF가 마라위 사태를 거론하면서 “BOL 통과가 시급하다”고 역설했던 건 평화답보 상태가 이런 상황을 낳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지난 7월 국제위기그룹이 발표한 ‘마라위 전투 이후 무슬림 반군 문제 해결을 위하여’ 보고서에 따르면 IS 추종 무장단체 ‘아부 사야프’의 한 정파로 분류되는 마우테그룹은 MILF의 젊은 대원들 사이에서 주로 모집 대상을 찾아 왔다. 마우테그룹 지도자인 압둘라 마우테와 오마르 마우테 형제, 두 사람의 부친인 카야모라 마우테는 모두 MILF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두 조직 간에는 혈연과 혼인으로 연결된 친인척 관계도 다수 있다. 2008년 ‘방사모로 이슬람 자유전사단(BIFF)’이 MILF의 분파 조직인 것처럼, 마우테그룹도 필리핀 정부와 협상하는 MILF 노선에 불만을 품고 탈퇴한 이들이 꾸린 단체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런 급진 세력을 방치하는 건 민다나오 지역을 동남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허브로 키우는 격이어서, MILF와 필리핀 정부 모두에게 민다나오 평화협상은 서둘러 진척시켜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가 되고 말았다.
방사모로(‘모로인들의 국가’라는 뜻)가 직면한 당장의 도전은 물론 내년 1월 BOL에 대한 주민투표다. 이를 통과하지 못할 경우, 마우테 잔존세력이나 IS 추종 정파가 포함된 BIFF 등의 테러 공격에 취약해지기 쉽다. 지난달 18일 민다나오 마귄다나오에서 벌어진 BIFF와 MILF 간 교전은 평화 프로세스에 참여하지 않는 무장단체들이 미래의 BARMM에서 ‘반군’이 될 수 있음을 암시했다.
BOL이 주민투표를 통과한다 해도, 민다나오 평화 정착을 향한 길목에 도사린 난제는 많다. 예컨대 내전 종식에 따른 반군 무장 해제는 빠지지 않는 논란거리다. 내전이 끝나면서 반군이 ‘정규군’에 편입된 대표적 사례는 네팔에서 찾아볼 수 있다. 네팔은 2006년 무장투쟁을 중단한 마오이스트 반군의 정규군 전환 과정에서 기존 정부군과 정치권이 거세게 반발, 커다란 진통을 겪었다. 2011년 11월이 되어서야 과거 반군은 국군에 편입되기 시작했고, 그 결과 1,400명 가량이 정규군 일원이 됐다.
필리핀의 경우, BOL 11장에 따르면 방사모로의 방위 임무는 기본적으로 필리핀 중앙정부의 몫이다. 다만 MILF와 MILF의 모태인 모로민족해방전선(MNLF) 출신들은 ‘방사모로 지역 경찰’에 선발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이들은 필리핀 경찰(PNP)의 지휘를 받는 지역경찰이다. 한때 치열하게 전투하던 조직들이 상하명령 체계하에서 어떻게 움직일지는 중대한 실험으로 남아 있다. MILF 지도자 알 하지 무라드 이브라힘은 지난 7월25일 마닐라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BOL이 온전히 실행된다면”이라는 전제를 달고 “3만~4만명 정도인 MILF 전사들을 무장해제하겠다”고 밝혔다. MILF 평화협상팀장 모하게르 이크발은 “MILF는 더 이상 무장조직이 아니라 ‘사회운동조직’으로 남게 될 것”이라며 “BOL이 주민투표에서 통과되면 우선 MILF 전투력의 30% 감축부터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이크발은 무장해제의 타임 테이블을 구체적으로 특정하진 않았지만 “이상적으로 보면 2022년 대선 이전에 완전 무장해제를 하는 게 좋다”고 덧붙였다.
과연 BOL은 약 50년간 지속되며 15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민다나오 내전을 종식시킬 수 있을까. 동남아시아의 최대 무장반군 MILF는 무기를 완전히 내려놓을 것인지, IS 추종 급진 무장조직들의 향배는 어떻게 될지 등 수많은 물음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 필리핀 민다나오의 평화 실험을 전 세계가 또다시 지켜보고 있다. 이런 가운데 폐허 도시로 1년간 방치됐던 마라위의 ‘그라운드 제로’에선 지난달 30일 드디어 재건 작업이 시작됐다.
이유경 국제분쟁전문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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