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기업 배상’ 법대로 하면 외교전… 정부가 대신 갚으면 피해자 반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일본 기업이 배상해야 한다는 30일 대법원 판결 후속 조치를 놓고 정부의 묘수 찾기가 한창이다. 법대로 일이 흘러가도록 내버려둘 경우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을 피할 수 없게 된 상황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경제 협력금을 받고 채권을 포기하기로 한 50여년 전 정치적 타결대로 정부가 일본 기업 대신 돈을 갚아주자니 일제에 불법 책임을 물으려는 피해자들의 속이 풀릴 리 없다. 뾰족한 해법이 없는 만큼 일단 국민 의견 수렴과 대일 입장 조율이 병행될 전망이다.
그동안 우리 정부는 한일 청구권 협정문과 협상 과정이 기록된 외교문서 검토 결과를 토대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개인 청구권에 입각해 일본에 배상을 요구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2005년 노무현 정부 당시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 관련 외교 문서를 공개하면서 꾸려졌던 ‘한일수교회담 문서공개대책 민관 공동위원회’에서 이런 입장이 정해졌었다.
하지만 대법원 판결로 현재 정부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이라는 정치적 타결을 유지해야 한다는 현실론과 당시 청구권 자금에는 강제징용 배상금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국내 최고법원의 판단 사이에 끼어 있는 형편이다. 문제는 법원이 기업 자산 압류 등 강제집행에 들어갈 경우 일본 기업이 불복할 가능성이 명약관화한데도 정부가 이를 막을 장치가 없다는 점이다. 상황 관리를 제대로 못하면 일본과의 분쟁으로 자동 비화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대응 방안 마련을 위해 ‘피해자 상처 치유’와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두루 고려하겠다는 이낙연 국무총리 명의의 입장문에서는 난감한 정부의 속내가 읽힌다.
정부는 일단 민관 협의체에서 해법을 찾는 방향을 택했다. 한일 청구권 협정에 관한 입장을 180도 뒤집을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만일 일부 변경하더라도 정부 독단일 경우 발생할 수 있는 파장을 최대한 완충하고 여론을 관리하는 데 유리하다는 계산이 선 듯하다.
가장 현실적인 건 우리 정부가 부담을 지는 방식이라는 게 다수 전문가들 얘기다. 판결 당시 권순일ㆍ조재연 대법관이 ‘한국 정부가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보상을 해야 한다’는 소수의견을 내기도 했다. 1975~1977년 한국 정부가 ‘대일 민간청구권 보상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징용 사망자 8,000여명의 미지불 임금에 대한 보상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정부 보상이 불법 행위에 대한 배상과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른 데다 피해자들의 소송 제기 목적은 물론 사회 통념과도 어긋난다는 점이 걸림돌이다. 한 국책연구기관 소속 전문가는 31일 “이번 판결로 과거 징용자 배상금을 대신 받은 한국 정부를 상대로 피해자가 구상(求償)을 요구하게 유도할 명분이 더 희박해졌다”고 말했다.
앞서 제2차 세계대전 가해국인 독일이 전후 강제동원 피해 보상을 위해 세웠던 ‘기억ㆍ책임ㆍ미래’ 재단을 벤치마킹 하는 방법도 대안으로 거론된 적이 있기는 하다. 한일 양국 정부와 징용자를 고용했던 일본 기업 및 한일 청구권 자금의 혜택을 본 한국 기업들이 ‘2+2 재단’을 만들어 보상한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추가 재정 부담을 떠안을 이유가 없다고 여기는 일본 정부의 태도가 난관이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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