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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들킨 죄, 찍힌 죄

입력
2018.10.31 18:18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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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 재판거래 의혹으로 서울중앙지법의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연합뉴스
지난 26일 재판거래 의혹으로 서울중앙지법의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연합뉴스

“대한민국 형법엔 300여개 죄목이 있어요. 그런데 전 딱 2개면 된다고 봅니다. 그게 뭔지 아세요?” 서초동 현역 시절, 방귀깨나 뀌는 분들을 제법 구속시켜본 한 법조인이 던진 농반진반 퀴즈다. 답은 간단했다. 하나는 ‘들킨 죄’, 다른 하나는 ‘찍힌 죄’. 일종의 블랙유머에 웃고 있는데, 그는 정색하고선 이게 영감님들 정신건강에 효과적이라는 설명을 더했다. 화이트칼라 범죄자치고 억울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그럴 때 ‘들킨 죄 아니면 찍힌 죄’라 설득(?)하면 서서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고 한다.

□ 그때 떠오른 건 “중국에는 신도 없고 법도 없다’”는 문장이다. 최고의 동양학자로 꼽히는 마르셀 그라네(1884~1940)가 중국 사상 연구를 마무리 지으며 남긴 문장이다. 유교 문화권에 속한 우리는 도덕적 교화를 내세운 덕치(德治)가 법치(法治)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다. 법치는 냉혹하고 덕치는 훈훈하다 여긴다. 하지만 이는 법치주의를, 그저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냉혹하게 처벌하는 것으로 간주하던 왕조 시대의 습성 때문이다. 법치주의가 그저 시위대, 노조, 빨갱이 잡아다 족치는 것이라 여기는 이들이 많은 건 그 잔재다.

□ 법은 그런 게 아니다. 가령 대한민국 헌법 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지닌다.” 그럴 리 없다는 건 아침 신문만 펼쳐 봐도 안다. 뉴스는 온통 너덜너덜해진 존엄, 가치, 행복, 인권 이야기다. 그럼에도 법은 시치미 뚝 떼고 그러하다고 선언한다. 마치 예수가 난데없이 복음을 선포하듯. 서양은 신과 법이 있고, 동양은 신도 법도 없다는 그라네의 얘기는, 바로 그 얘기다. 신과 법의 빈자리를 채우는 건 권력이다. ‘찍힌 죄 아니면 들킨 죄’는 사실, 권력을 빼앗긴 죄다.

□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판결이 나왔다. 재판 거래 의혹으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구속된 뒤끝이다. 선의로 보면 한일관계, 배상금 지급의 실효성 등 고려할 게 많은 사안이었다. 그럼에도 사법부의 1차 역할은 “이것이 바로 사법적 정의”라는 선언이어야 했다. 상황, 여건, 파장을 걱정하고 대비하는 건 정치다. 재판이 아니다. 재판 거래 수사를 억울해하기 전에 법원이 그 선언적 역할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먼저 돌아볼 문제다.

조태성 문화부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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