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 피해 구제 길 열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일본 기업이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소영 대법관) 판결은 같은 사건에 대해 일본 최고재판소(우리의 대법원격)가 내린 결정을 정면으로 뒤집은 것이다. 일본과 한국 정부가 반세기 이상 고수해 온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 대한 해석 또한 전면 부정하며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구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대법원은 여운택씨 등 4명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재상고심에서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이 여씨 등에게 각 1억원씩 배상하도록 한 원심 판결을 확정하면서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은 청구권협정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단순한 미지급 임금이나 보상금이 아니라 일본 정부와 기업의 불법 행위에 대한 위자료청구권은 한일 청구권협정에 처음부터 포함되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은 1965년 체결된 한일 청구권협정에 따라 일본으로부터 받은 돈(무상 3억달러ㆍ차관 2억달러)에 강제징용 피해 배상금이 이미 포함돼 있는지 여부다. 당시 협정문에는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적혀 있다. 또한 ‘모든 청구권에 대해 어떤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는 문구도 있다.
일본 정부는 물론이고 그간 한국 정부와 학계에서도 청구권 협정에 강제징용으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권이 포함된다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일본 최고재판소 역시 2003년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이 같은 논리로 원고 패소 판결을 확정했다.
하지만 이날 재판장인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 총 13명 중 11명은 다른 결론을 냈다. 대법관 다수(7명)는 “청구권 협정은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조약 4조에 근거해 한일 양국간 재정적ㆍ민사적 채권ㆍ채무 관계를 정치적 합의에 의해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고 봤다.
1965년 정부가 발간한 ‘한·일회담 백서’도 근거로 제시했다. 백서에는 ‘대일청구권은 승전국의 배상청구권과 구별된다.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조인 당사국이 아니어서 승전국이 향유하는 손해 및 고통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인정받지 못했다. 한일간 청구권 문제에는 배상청구를 포함시킬 수 없다’는 대목이 있다는 것이다. 대법관 다수는 이를 바탕으로 “청구권 협정문이나 그 부속문서 어디에도 일본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언급하는 내용은 전혀 없다”고 했다. 또 “협상과정에서 요구액(12억2,000만달러)보다 훨씬 못 미치는 3억달러(무상)만 받게 됐는데 (여기에)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도 포함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김재형ㆍ김선수 대법관은 “조약 해석의 일반 원칙에 비춰 타당한 결론”이라며 다수 의견에 대한 보충 의견도 냈다.
김소영ㆍ이동원ㆍ노정희 대법관은 ‘결론은 같지만 근거는 다르다’며 별개 의견을 제시했다. 김소영 대법관 등은 “여씨 등의 손해배상 청구권도 한일 청구권협정 적용 대상에는 포함되지만, 이는 자국민이 외국에서 위법한 취급을 받은 경우 대한민국이 구제를 요구할 수 있는 외교적 보호권을 포기한 것으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됐다 볼 근거는 없다”고 설명했다. 이기택 대법관은 또 다른 별개 의견에서 “2012년 대법원 판결에서 이미 손해배상 청구권이 한일 청구권협정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해당 판결 기속력에 의해 재상고심인 이 사건에서도 같은 판단을 할 수 밖에 없다”고 밝혔다.
반면 권순일ㆍ조재연 대법관은 일본 기업이 아닌 한국 정부가 피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반대의견을 냈다. 권순일 대법관 등은 “한일 청구권협정은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이나 일본인을 상대로 소송을 통해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제한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며 “이 협정을 무효라고 볼 것이 아니라면 내용이 좋든 싫든 지켜야 하고 피해를 입은 국민에게 국가(한국 정부)가 정당한 보상을 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봤다.
대법원은 또 “▦일본 법원의 판결은 그 내용이 우리나라의 선량한 풍속이나 사회질서에 반하는 것으로 그 효력을 인정할 수 없고 ▦옛 신일본제철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피고(신일철주금)에 대해서도 행사할 수 있고, ▦피고 측이 주장하는 민법상 소멸시효 완성 주장은 권리남용으로서 허용될 수 없다”고 만장일치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유환구 기자 red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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