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드니 라일리(Sidney Reilly)는 20세기 초반 유럽을 무대로 활약한 영국 첩보원으로, 이안 플레밍 원작 007시리즈의 주인공 ‘제임스 본드’의 모델이 된 인물이다. ‘Ace of Spies’라 불리는 그는, 보어전쟁(2차, 1899~1902)서부터 러일전쟁, 1차대전, 러시아혁명과 레닌 실각 공작, 종전 후 미국 적색 공포를 조장하기 위한 일련의 메일폭탄 공작 등 숱한 사건을 주도하거나 개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5년 영국의 이란 페르시아만 유전 채굴권 장악과 BP(British Petroleum) 창립을 가능하게 한 이른바 ‘다르키 사건(d’Archy Affair)의 배후도 그였다.
라일리는 본드처럼 온갖 무기와 첨단 장비를 갖춘 ‘훈련된’ 첩보원이 아니라 ‘타고난’ 사기꾼에 가까웠다. 알려진 바 그는 애국심이나 사상적 신념보다 사적 이익을 좇아 활동한, 이를테면 거물 프리랜스 정보원이었다. 그의 고객은 주로 영국이었으나, 일본 해군에 러시아 군사정보를 팔기도 했다. 라일리가 본드와 가장 유사했던 건 여성 편력이었던 듯하다. 신사적인 매너와 자신감 넘치는 태도, 필요에 따라 상대에게 헌신적이기도 했다는 그는 최소 3차례 중혼했고, ‘The Gadfly’의 작가 이선 릴리언 보이니치(Ethan Lilian Voynich) 등 다수의 여성과 꽤 지속적인 연인 관계를 유지했다. 정보를 캐기 위해 러시아 군장성의 부인 등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예도 적지 않았다.
그의 출생연도와 출생지, 본명, 생애 전반의 이력은 분명치 않지만 폴란드 오데사 인근에서 1873년 혹은 74년에 태어났다는 게 다수설이다. 아버지는 차르 왕정에 복무하던 러시아 육군 대령이었지만 생부는 어머니가 알고 지내던 유대인 의사였다고 한다. 반유대주의자였던 그는 대학 시절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안 뒤 충격을 받고 ‘페드로’란 이름으로 신분을 세탁, 영국 상선을 타고 남미로 건너갔다가 영국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사기-첩보’행각을 벌이기 시작했다. 부유한 사업가의 아내를 유혹해 남편을 독살하게 한 뒤 과부와 결혼, 재산을 가로챈 것을 시작으로 그는 영국 해외정보부(MI6)의 전신인 SIS 소속으로, 때로는 프리랜스로, 앞서 열거한 사건들에서 대담한 활약을 펼쳤다.
그는 러시아의 역(逆)공작에 걸려 1925년 11월 5일 소련정치국 비밀경찰(OGPU)에 의해 모스크바 외곽 숲에서 처형됐다. 최윤필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