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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산업단지 “공장ㆍ상인 야반도주 속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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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산업단지 “공장ㆍ상인 야반도주 속출”

입력
2018.10.31 04:40
수정
2018.10.31 08:12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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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너지는 한국경제 현장] 

 하청업체들도 이탈 러시… 유령도시로 변모 

 일감 없는 업체들 인력 감축, 실업률 급증 

 “가게 하루 매상 1만원도 안돼… 더 못버텨” 

제조업 평균가동률=그래픽 강준구 기자
제조업 평균가동률=그래픽 강준구 기자

“요금이 밀려 직접 찾아 가보면 문을 닫은 채 종적을 감춘 업체가 많다. 이달에만 이렇게 도망 친 업체가 한 둘이 아니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린 지난 26일 경북 구미산업단지에서 만난 보안업체 간부 곽모(50)씨는 “삼성전자, LG전자 등 대기업이 떠난 뒤 하청ㆍ재하청업체들도 줄줄이 빠져 나가고 있는 상황”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구미새마을중앙시장 인근에서 10년 넘게 주차장 사업을 해 온 이모(60)씨도 “최근 장사하는 사람들 중 경기가 안 좋아 월세도 못 벌자 ‘야반도주’하는 이가 부지기수“라며 “주차장 손님은 1년 새 10분의 1로 줄었다”고 토로했다. 주차장 사무실에서 담배도 함께 파는 이씨는 “야반도주가 보통 마음으로 되는 게 아닌데, 얼마나 시달렸으면 그랬겠느냐”며 “담배회사 영업사원도 담뱃값을 떼먹고 사라지는 매장이 많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26일 경북 구미시 구미역 앞 1번도로 인근에 폐업한 상가에 임대를 알리는 안내판이 걸려있다. 구미=이대혁 기자
26일 경북 구미시 구미역 앞 1번도로 인근에 폐업한 상가에 임대를 알리는 안내판이 걸려있다. 구미=이대혁 기자

이날 ‘구미의 명동’으로 꼽히는 구미역 앞 1번 도로에선 우산을 쓴 사람들만 제 갈 길을 가느라 분주했다. 길 양 쪽으로 귀금속, 분식점, 스포츠용품점, 옷가게, 커피숍 등이 쭉 늘어서 있었지만 어느 하나 사람들로 붐비는 곳은 없었다. 상인들만 ‘혹시 손님이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인도가 보이는 창가를 연신 바라봤다. 길을 따라 걷자 ‘임대’를 알리는 간판이 여럿 눈에 띄었다. ‘급매’ 안내문이 붙은 유리창 너머 빈 매장 안엔 벌거벗은 마네킹과 옷걸이만 흩어져 있었다. 구미역이 정면으로 보이는 길엔 6층짜리 건물 전체를 임대한다는 플래카드도 나부꼈다. 주민 김모(67) 할머니는 “구미역도 있고 시장도 가까워 워낙 장사가 잘 돼 예전엔 ‘임대’ 간판을 볼 수 없었던 곳”이라며 “구미 경기가 완전히 죽었다”고 말했다.

 

26일 경북 구미 공단동의 폐업한 지 꽤 지난 것으로 보이는 호텔. 구미=이대혁 기자
26일 경북 구미 공단동의 폐업한 지 꽤 지난 것으로 보이는 호텔. 구미=이대혁 기자

 

 ◇문 닫고 떠나는 기업에 도시 공동화 

정부는 현재의 경제 상황에 대해 ‘침체’는 아니라고 강변한다. 투자와 고용이 불안하지만 수출과 소비가 견조하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실제 현장의 경기는 이미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경기 지표에는 드러나지 않은 경기 주체들의 목소리엔 때로는 울분과 격앙이, 때로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공장이 밀집한 구미 공단동으로 이동하는 중에도 폐허가 된 채 방치된 공장과 모텔, 식당 등이 곳곳에 있었다. 전봇대마다 ‘공장 신속처리!’, ‘공장 매매ㆍ임대’ 등이 쓰인 전단지가 눈에 띄었다. 공단동 대로변의 한 건물에서 30년 동안 소매점을 운영했다는 윤모(68)씨는 “기업들이 떠나면서 인구도 급감하고 있다”며 “최근엔 손님이 없어 하루 매상 1만원을 겨우 올릴 때도 많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구미는 이미 공동화 현상을 겪고 있다. 베트남이나 파주로 떠난 삼성전자, LG전자를 따라 하청업체들도 모두 폐업하거나 이전하면서 인구급감, 실업률 급증 등 난제들이 축적되는 형국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상반기 구미의 실업률은 5.2%로, 지난해 하반기 4.3%보다 1%포인트 가까이 급증했다. 이는 우리나라 전체 실업률(3.5%)을 훨씬 웃돌고 경북 23개 시ㆍ군 가운데도 가장 높은 수치다. 일거리를 찾아 산단을 중심으로 유입됐던 인구도 2012년부터 순감으로 돌아서 지난해까지 6년 동안 1만1,020명이 빠져나갔다. 곽씨는 “직원 400여명이던 회사가 최근 30여명 수준으로 격감한 하청업체도 있다”고 말했다. 급기야 이 지역 시민단체들은 지난 7월 ‘구미삼성지키기 범시민운동본부’를 설립해 기업 이전 반대 서명운동에 나섰다. 기업이 빠져 나간 뒤 부동산 시장과 자영업자들도 몰락하자 시민들이 호소하고 나선 것이다.

숙박업소와 음식점, 유흥업소, 원룸촌 등이 형성된 인동으로 가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인근에 삼성전자 직원 숙소 등 산단 근로자들이 아직 남아 있는데도 이곳 역시 곳곳에 임대 간판이 내걸려 있었다. 1년 넘게 편의점에서 일 했다는 강모(23)씨는 “3,4개월 장사하다 문을 닫고 주인이 바뀌는 곳이 허다하다”며 “장사가 안 되니까 버틸 수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북 구미 공단동의 한 전봇대에 공장 매매를 알리는 스티커가 붙어 있다. 구미=이대혁 기자
경북 구미 공단동의 한 전봇대에 공장 매매를 알리는 스티커가 붙어 있다. 구미=이대혁 기자

 ◇불 꺼진 산단, 성장 엔진도 멈춘다 

경북 경산산업단지도 1차 부도를 맞은 자동차부품회사와 문을 닫은 섬유공장이 많아 적막감만 가득했다. 이따금 대형 트럭이 오갈 뿐 공장 돌아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곳의 한 제조업체 근로자 김모(45)씨는 “작년 초까지만 해도 주중ㆍ주말을 불문하고 밤에도 공장 돌아가는 소리로 활기가 넘쳤던 곳이 경기가 급속도로 나빠지면서 점점 유령도시로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비용 부담이 커진 업주들이 인력을 감축하거나 아예 공장을 매물로 내놓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우리 회사도 최근 최저임금 인상을 감당할 수 없다며 외국인 노동자 한명과 관리직 직원 두 명을 내보냈다”며 “정부는 소득주도성장이라는데, 일자리 잃는 사람들만 쏟아내고 있다”고 열을 올렸다. 인근 H마트 30대 주인 송모씨는 “경산산단은 이미 죽었다고 보면 된다“며 “우리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조만간 떠날 생각”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강조하는 소득주도성장이 현실에선 기업들과 자영업자들을 생활전선에서 몰아내는 방식으로 구현되고 있는 셈이다.

경북 구미 공단동의 한 건물 1층 내부에서 한 상인이 비어 있는 상점 부지를 가리키고 있다. 예전엔 각종 상점들이 성업했던 곳으로 지금은 모두 폐업해 텅 비어 있다. 구미=이대혁 기자
경북 구미 공단동의 한 건물 1층 내부에서 한 상인이 비어 있는 상점 부지를 가리키고 있다. 예전엔 각종 상점들이 성업했던 곳으로 지금은 모두 폐업해 텅 비어 있다. 구미=이대혁 기자

 

 ◇흔들리는 공정경제 

규제개혁을 핵심으로 한 정부의 혁신성장이 더디게 진행되면서 대기업도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긴 마찬가지다. 오히려 이런 대기업이 비용 절감에 나서면서 하청업체들은 일감 감소에 비용 인상이란 이중고를 겪고 있다. 특히 중소기업들은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납품단가 인상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대기업도 여력이 없는 실정이다. 문재인 정부의 핵심 경제 기조인 ‘공정경제’까지 흔들리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부품업체 A사는 각 6,600㎡ 규모인 공장 2곳 중 1곳을 올해부터 멈췄다. 1차 협력사를 거쳐 A사로 넘어오는 부품 물량이 50%나 줄었기 때문이다. 2015년 이후 납품단가가 인상되지 않아 최근 3년간(2015~2017년) 내리 적자를 기록하며 한계에 내몰린 상황인데 물량마저 급감해버린 것이다. 작년에는 60명이 넘는 직원들이 평일 내내 야간 잔업(오후 7시~9시30분)을 했는데, 올해는 잔업 없이 주 3,4일만 근무하고 있다. A사 대표는 “올해는 겨우 적자를 피할 것 같은데 그것도 사실 1차 협력사가 단가를 일부 올려줬기 때문”이라며 “내년 최저임금이 10.9% 또 오르면 대기업이 단가를 올려줘야 하는데 그럴 기미는 안 보여 막막하다”고 토로했다.

충남 천안의 자동차 차체 부품 공장을 둔 연 매출 100억원대의 2차 협력사 B사는 최근 폐업 신고서를 냈다. 최근 7년간(2010~2017년) 누적 적자가 15억원까지 불어났기 때문이다. 적자를 모두 은행권 대출로 메우다가 결국 한계점에 도달했다. B사 대표는 “매년 단가를 깎는데 3년 정도 지나면 재료비(70%)만 받고 부품을 생산하게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과거엔 자동차 생산물량이 200만→400만→500만대 등 꾸준히 불어난 탓에 단가 인하에도 ‘박리다매’로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엔 자동차 산업의 성장이 정체되며 다매(多賣)도 사라졌다.

 

 ◇상황 맞춰 속도 조절 필요 

전문가들은 정부가 경제 정책의 궤도 수정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입을 모았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투자, 고용 부진과 더불어 미중 무역분쟁으로 중국 경기까지 침체되면 한국 경제가 받을 타격은 매우 클 것”이라며 내년 성장률이 2%대 초반까지 떨어질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우석진 명지대 교수는 “경제는 생물처럼 변하는데 당초 정책 기조만 마냥 고집하겠다는 것은 무리”라며 “상황에 맞게 정책 속도를 조절하는 게 곧 경제팀의 실력”이라고 강조했다. 최배근 건국대 교수도 “소득주도성장, 공정경제 강화가 지속가능 하려면 우선 경제 전체의 파이가 커져야 한다”며 “산업구조를 전면 개편해 신성장동력을 찾는 청사진부터 제시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구미ㆍ경산=이대혁 기자 selected@hankookilbo.com

울산=박준석 기자 pjs@hankookilbo.com

세종=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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