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이모(46)씨는 지난해 9월 한 마라톤 동호회에 가입했다가 첫 모임 직후 탈퇴한 뒤로 번개런 같은 일회성 러닝 모임에만 참석한다. 회사동료 권유로 참가한 마라톤대회(10㎞)에서 큰 성취감을 느껴 거주지(서울 서초구)를 기반으로 둔 장년층(50,60대) 동호회에 가입했는데, 첫날부터 원래 목적이던 달리기보다 갖은 잡무를 떠맡게 되면서다. 27일 만난 이씨는 “‘막내(이씨)가 새로 왔으니 총무를 맡기면 되겠다’는 회원부터 나이와 경력을 들먹이며 반말을 뱉는 회원, 여기에 신입회원을 얕보는 듯한 묘한 분위기까지 겹쳐 거부감이 컸다”면서 “그 뒤로 번개런의 존재를 알게 돼 지난 1년여 간 한 달에 한 번 꼴로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번개런 참가자들은 함께 달린다는 목적은 이루면서도 낯선 이들과 얽히는 과정에서 느끼는 부담감을 피할 수 있는 점을 가장 큰 매력으로 꼽는다. 이씨만 해도 동호회 선택 단계부터 고민이 컸다고 한다. ‘서초구 마라톤 동호회’를 검색해보니 20,30대 청년층으로 구성된 동호회와 50,60대가 모이는 장년층으로 구성된 동호회뿐이라 설 곳이 마땅치 않았다는 게 이씨 얘기. 그는 “그나마 체력 면에서 젊은이들보다 ‘형님들’과 발맞춰 뛰는 게 좋겠다는 판단에 장년층 동호회에 가입했는데, 동호회라기보다 또 하나의 사회생활이 시작되는 느낌이었다”라면서 “일회성 모임에선 자체규율을 만들고 따르거나 회식 등 추가모임에서 오는 피로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 좋다”고 했다.
가성비를 넘어 ‘가심비(가성비에 심리적 만족까지 취하는 소비형태)’까지 추구하는 2030세대에게 일회성 운동 모임은 어느덧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지루함을 줄이고 실력은 높이면서도, 시간과 체력, 금전을 소비하게 되는 뒤풀이는 피할 수 있다는 게 2030이 꼽는 번개런의 장점이다. 최근 번개런에 참가했다는 취업준비생 허태성(31)씨는 “공부를 하는 입장에서 효과적인 운동을 하고 싶지만 친목이 강조되는 동호회 가입은 부담되는 게 사실”이라며 “운동 후 모여 고기를 굽거나 술을 마시면 운동 효과가 반감되는데, 실제로 (오픈런에선)러닝 뒤 모임을 이어가는 게 금기시 되는 분위기라 마음이 편했다”고 했다. “금전과 시간, 감정을 낭비하지 않아서 좋다”는 게 참가자 대다수의 반응이다.
모임이 수시로 열리고 사라지는 ‘장마당’ 기능을 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번개런 확산의 일등공신이다. 인스타그램에 모임 장소와 시간을 공지해 만나거나,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 일시적으로 모여 운동을 한 뒤 함께 찍은 사진 정도만 공유한 뒤 모든 구성원이 자발적으로 탈퇴하는 식이다.
최소 참가인원을 설정해두거나, 회비를 걷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 참여 의사를 남겨놓곤 ‘노쇼(No Show)’를 하더라도 별다른 문제나 갈등이 생기지 않는다. 윤지영(27)씨는 “참여가 간편하고 누구든 진입장벽 없이 함께 뛸 수 있는 게 장점이지만, 소속감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에겐 적합하지 않은 모임”이라고 조언했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스마트폰의 보편화로 굳이 커뮤니티를 지속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모임을 언제든 만들고, 없앨 수 있다는 걸 체득한 젊은 층에겐 동호회보다 일회성 모임이 훨씬 더 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고 했다. ‘내가 결정하고 내가 선택한다’는 대원칙 아래 불필요한 심리적 구속은 사절하는 현상은 독서토론회나 꽃꽂이, 면접 스터디 같은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확산돼 가고 있다는 게 이 교수 얘기다.
이 같은 일회성 모임의 확산은 지속적인 공동체 생활보다 개인생활에 집중하는 사회 변화를 투영하고 있다. 김귀옥 한성대 사회학과 교수는 “자연스레 서로의 처지를 비교하거나 계급화가 이뤄지는 공동체 문화와 달리, 일회성 모임에선 누가 어떤 사람인지 크게 개의치 않아 타인을 크게 의식할 필요가 없다”라며 “다만 익명성에 숨어 무책임한 행동이 반복된다면 일회성 모임의 순기능이 퇴색될 수 있는 만큼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형준 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석경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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