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윤식 선생님께] 서영채 서울대 교수가 한국일보에 보내온 추도사
그는 향기로운 사람이었다. 첫 문장을 이렇게 적고 나니 가슴이 아리다. 내가 그에 대해 이런 말을, 그것도 완료형으로 하게 되다니! 그가 세상을 떠난 날 밤, 장례식장 보관실의 어둠 속에서 그의 사진과 마주섰을 때, 가장 먼저 내게 밀려온 감정은 슬픔이 아니었다. 내 심장을 아프게 움켜쥔 것은 사무치는 그리움이었다. 보통 사람들과는 매우 달랐던 한 존재가 지니고 있던 기품, 지나치게 괴팍해서 고약해 보이기도 하고 엉뚱한데도 어느 순간 갑자기 거인처럼 육박해오는, 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어도 알기 힘든 그 독특한 향기. 살아생전에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 존재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
사람들은 그를 한국 문단의 큰 스승이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그는 누구에게도 스승이고자 하지 않았다. 대학 교수로서 자신은 지식의 전달자일 뿐이라고 냉소적으로 말하곤 했다. 삶의 길을 가르쳐주는 스승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고, 제 길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내가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데, 어린 학생들에게 어떻게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충고할 수 있겠냐고 투덜거리곤 했다. 또, 평생 남의 글이나 들여다보는 것이 평론가의 삶이자 글쓰기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기계처럼 읽고 썼다. 읽고 쓰는 일에 관한 한 그는 한결 같았다. 이제 건강 좀 챙기시고 그만 쓰시라는 말에, 말년의 그에게서 돌아온 답은 이랬다. 나 보고 죽으라고 하나? 그가 사람들에게 준 교훈은 말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주어로 내세운 3인칭의 글쓰기를 통해서였다. 그의 글은 말한다. 뒤돌아보지 말아라, 돌아보면 돌이 된다, 앞으로 앞으로만 나가라. 사람들이 그를 스승으로 섬긴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 그가 바로 그 스승의 자리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고자 애쓰지 않았다. 그런 것을 위해 써야 하는 힘과 시간이 아까웠을 것이다. 때로는 비굴할 만큼 겸손했고, 돌아서서는 한없이 오만했다. 싫은 것은 가차 없이 싫어해서 없는 적을 만들기도 했다. 그가 태연하게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이르고자 하는 땅이 다른 데 있기 때문이다. 그가 가고자 원했던 세계는 가치나 이념의 전쟁터 같은 곳이 아니라, 사실과 맥락이 묻혀 있는 황무지이다. 그런 그에게서 내가 보았던 것은 존경을 바칠 만한 스승이 아니라 매력적인 친구의 모습이었다. 거기에 스승이라는 단어를 붙인다면 그는 모욕으로 느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는 우람하게 버티고 선 거대한 존재가 되어 있곤 했다. 그는 이념과 가치에 대해 말하고자 하지 않았으나, 그럼으로써 그는 스스로 이념이자 가치가 되었다.
말년에, 젊은 사람들이 모인 한 강의실에서 그는 지나가는 말처럼 고독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유서 깊은 한 독일 대학의 교훈이 진리 자유 그리고 고독이라고. 진리와 자유란 모든 대학의 모토이다. 그러니 특이한 것은 고독일 수밖에 없다. 3인칭으로 존재하는 진리의 세계는 싸늘한 곳이다. 그 세계가 요구하는 것은 차가운 열정이다. 공부를 하려는 자라면 모름지기 집과 부엌을 떠나야 한다. 그것이 고독의 요체이다. 그 차가움을 버티고자 하는 사람은 고독 속에서 스스로를 단련해야 한다. 고독은 곧 대학의 이념이 요구하는 장소이다. 뒤에 확인해보니, 그 대학의 교훈에 고독은 없었다.
아마도 착각이었을 것이나, 그런 사정이야 어떻든 그 대학의 교훈에 없는 고독이야말로 그가 꿈꾸었던 대학의 이상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 대학이 어디든 어느 나라 땅에 있든 아무런 상관이 없겠다. 대학의 교훈 따위 있건 없건 아무래도 무관하다. 중요한 것은 향기이지 울타리 같은 것이 아니니까. 그 향기에 나는 눈이 멀었고 그래서 행복했다.
나는 지금 일본 도쿄에 있다. 그가 건강할 때 매년 오곤 했던 학회에, 그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와있다. 영정 사진이 보관된 장례식장의 어두운 방문을 닫고 이튿날 새벽에 떠나 왔으나, 여기에도 온통 그의 흔적이다. 그가 묵던 숙소 그가 가던 식당에서, 그리고 그의 향기를 아는 사람들과 함께 나는 여기에서 그를 영결한다. 니체의 말투를 빌린다. 피하라 너의 고독 속으로! 보고 싶어요, 선생님. 사랑하는 선생님.
서영채 서울대 아시아 언어문명학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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