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 주재 한국 대사관은 로마 바티칸 시국에서 차로 20여분 걸리는 외곽의 주택가에 있다. 콘크리트 단층인 대사관과 마당을 공유하는 관저는 겉보기에 평범한 3층 건물이지만,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초현실주의 화가 데 키리코(1888~1978)가 줄곧 작품활동을 했던 곳이다. 우리 정부가 교황청과 수교하며 그의 부인으로부터 이 집을 사들인 게 35년 전이라고 한다. 국력이 세계 10위권인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대사관 및 관저의 위치나 규모가 어울리지 않지만 매입 당시엔 비용 문제와 함께 이런 내력도 감안했을 것이다.
▦ 조용하던 이 곳에 최근 스토리가 더해졌다. 지난 17일(현지시간) 교황청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성 베드로 성당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한 특별미사’에 참례한 뒤 미사를 집전한 피에트로 파롤린 국무원장 등 교황청 고위인사들을 대사관저로 초청해 공식 만찬을 가진 덕분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해외순방 중 방문국 주요 인사들과 자국 대사관저에서 식사외교를 펼친 것은 전례없는 일이다. 당초 이백만 대사가 ‘관저 이벤트’를 제안하자 호텔을 염두에 뒀던 청와대와 외교부는 경호나 의전 문제를 들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 이 대사는 지난 5월 교황을 알현한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이 대사관저 오찬을 가진 사례를 거론하며 청와대 등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문 대통령이 프란치스코 교황을 접견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방북 초청 의사를 전달하는 일정을 앞두고 있는 만큼 사전에 교황청 인사들과 편하게 친교를 나누는 자리로 관저가 제격이라는 취지였다. 대사관 쉐프인 강모(60)씨가 2007년 에콰도르 주재 대사관 쉐프로 근무할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특사로 방문한 문 대통령 부부를 돌본 각별한 인연까지 얘기하며 모든 의전을 책임지겠다고 했다.
▦ 막상 일을 저질렀지만 메뉴 선정부터 리허설까지 뒷치닥거리는 쉽지 않았다. 더구나 파롤린 국무원장ㆍ갈러거 외교장관과 함께 참석한 카밀레리 외교차관과 루키니 몬시뇰은 지난 9월 중국과 주교임명 문제를 해결한 인사여서, 교황의 방북이 실현될 경우 실무채널이 될 가능성이 높다. 문 대통령이 이들과의 만찬에서 2시간 가까이 한반도 평화정착 프로세스를 공들여 설명하고 공감과 지지를 끌어낸 이유다. 대사관저 옆 뜰에는 조각가 오채현씨가 2005년 기증한 ‘조선의 성모상’이 있다. 대통령은 이 조각상을 보며 어떤 기도를 했을까.
이유식 논설고문 jtino5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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