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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님아, 큰 소리로 그 말을 하지 마오

입력
2018.10.26 13:58
수정
2018.10.26 18:01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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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기 좋은 사람들에겐 애석하게도 기억력은 지능과 무관하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있다.

기억력 연구 대가인 신경생물학자 제임스 맥고에게 질 프라이스라는 여성이 이메일을 보냈다. 편지에서 그녀는 자신이 열한 살 이후의 과거를 죄다 기억한다고, 지나온 모든 삶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는 통에 미칠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타고난 허풍선이거나 거짓말쟁이는 아닐까? 하지만 연구자로서의 호기심이 팔순 넘은 노학자를 돌려세웠다. 프라이스를 만난 맥고는 여러 방면으로 테스트를 했다. 거짓이 아니었다. 당시 서른다섯 살이던 프라이스는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프라이스가 25년 동안 써온 일기를 이용해 과거 어느 날이든 무작위로 지목하면, 그날이 무슨 요일이며 어떻게 보냈는지를 통째로 기억했다고 맥고는 자신의 논문에서 밝혔다. 특별한 기억술을 연마한 것도 아니었다. 학창시절 성적은 그럭저럭, 지능 역시 평균에 머물렀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맥고와 동료들이 유사한 증상을 보이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연구한 끝에 밝혀 낸 사실은 그들의 뇌 중 아홉 개 부위가 정상인들과 다르다는 점이었다. 가령 측두엽이 보통 사람들보다 비대하거나 해마와 편도체를 전두피질과 연결하는 소뇌의 아주 작은 구조가 달랐다. 맥고는 이런 현상을 일컬어 ‘과잉기억증후군’이라 이름 붙였다. 나아가 이 과잉기억이 불안이나 우울, 행동장애를 유발하기 쉽다고 우려했다.

프라이스만큼은 아니어도 쓸데없는 과잉기억으로 인해 불편을 겪는 사람은 주변에 많다. 나도 그렇다. 젊어서 직장생활할 때도 손해를 봤다. 기민하고 열정 넘치는 상사는 다 좋은데 일관성이 좀 떨어졌다. 더구나 중요한 프로젝트에서 자신이 온갖 수사를 동원해 밀어붙였던 사안을 하루아침에 뒤엎으며 실무자를 족칠 때면 나도 모르게 미간에 세로줄이 생겼다. 궁지에 몰린 동료들이 그걸 놓칠 리 없어 사실대로 증언하라 다그치고, 그간의 일들을 판화 찍어 내듯 복기해 양자 간 얽힌 기억을 교정하는 난처한 꼴이 몇 차례 연출됐다. 젠장! 상사는 그 뒤부터 음식과 이야기가 어깨춤을 추는 재미난 자리에는 나를 데려가지 않았다.

월급쟁이 생활을 그만두고 나이 들면서 과잉기억이 유발하는 문제는 많이 줄었다. 이제야 기억과 망각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되는구나 싶었지만, 100개 넘는 회사가 입주한 빌딩으로 이사하면서 병증이 도졌다. 로비에서, 인근 식당에서, 엘리베이터에서 들리는 우렁찬 목소리들. 그들의 특징적인 말투와 표정이 수시로 머릿속에 콕콕 박혔다. “내가 이번에 만난 여자한테는 진짜 모든 걸 다 줘 가면서 잘했거든. 근데 이 x년이 또 뒤통수를 치네.” 모르는 청년의 연애사에 웃지도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던 나는 며칠 뒤 그 청년이 건물 앞 벤치에 앉아 전화기 저편 어느 여인에겐가 느끼한 작업멘트를 날릴 때 쓴웃음만 지었다. 한낮 엘리베이터에 동승한 여성은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통화를 이어 갔다. “아, 이 미친 또라이 신 팀장 xx가 돈을 얼마나 밝히는지…” 뒤에 선 채 눈만 흘기던 나는 하필 다음 날 점심시간 식당에서 마주친 그녀가 “신 팀장니임~.” 콧소리 내는 걸 보며 “야, 이 미친 또라이 신 팀장 xx야.” 불러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가만 보면 제멋대로 귓전을 파고들어 기억으로 남는 말들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감정이 실렸으며, 내용이 자극적이고, 하나같이 목소리가 크다는 것. 그 청년과 여성은 자신이 마구잡이로 내뱉은 말을 낯선 누군가가 기억하고 주시한다는 걸 상상이나 할까. 부탁이니, 제발 아무 데서나 큰 소리로 떠들며 감정 분출하지 말기를. 공중도덕 운운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치명타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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