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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사프사프 학살(10.29)

입력
2018.10.29 03:24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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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지 않은 흑백 사진은 1948년 10월 29일 이스라엘군이 저지른 아랍계 시민 학살 직후 모습이다.
낯설지 않은 흑백 사진은 1948년 10월 29일 이스라엘군이 저지른 아랍계 시민 학살 직후 모습이다.

1947년 9월 유엔 팔레스타인 분할안은 팔레스타인의 아랍계 시민과 범 아랍권으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거였다. 당시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 비율은 지속적인 유입에도 불구하고 전체의 33%였고, 소유한 땅의 비율도 7%가 채 되지 않았다. 저 안은 팔레스타인 영토의 56%(약 1.5만㎢)를 유대인에게 주고, 나머지 44%를 아랍계가 나눠가지라는 내용이었다. 더욱이 남부 곡창지대 등 경제적으로 쓸모 있는 땅 대부분이 유대인 차지가 됐고, 아랍계 영토 한복판 예루살렘은 유엔 관할 특별지역으로 지정됐다. 유엔 총회는 그 해 11월 유대계의 집요한 로비와 미국의 주도로 분할안을 승인했고, 이듬해 5월 이스라엘이 건국했다.

유엔 분할안의 내용이 전해진 뒤부터 산발적으로 이어지던 양측의 분전은 이스라엘 건국을 기점으로 아랍연맹과 이스라엘의 제1차 중동전쟁으로 확산됐다. 1948년 10월 29일, 이스라엘 국방군이 북부 갈릴리 마을 사프사프(Safsaf)에서 저지른 주민 학살은 그러니까 전시의 일이었다. 이스라엘은 레바논과 시리아, 요르단의 북부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 적성지역인 갈릴리지역 탈환전(Operation Hiram)을 전개했다. 그 중 한 마을이 사프사프였다. 탱크와 장갑차를 동원, 마을에 들이닥친 이스라엘 군은 민간인 주민 52~64명(증언에 따라 엇갈린다)을 굴비 엮듯 묶어 웅덩이 앞에 무릎을 꿇게 한 뒤 집단 학살했다. 14세 소녀를 비롯, 다수의 여성이 강간ㆍ살해 당했다고 한다.

만행이 알려진 건 사건 직후인 11월 6일 마을을 둘러본 유대인 국가기금(JNF) 요세프 나흐마니(Yosef Nachmani)의 일기가 1980년대 초 공개되면서부터였다. “잔혹극은 인근 마을에서도 반복됐다고 한다. 나치와 다를 바 없는 잔인한 수법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저 방법 말고는 주민들을 내쫓을 수 있는 인간적인 길은 없을까”라고 적었다.

물론 아랍계를 비롯, 지역 언론과 사학계 등이 수집한 증언과 사료들은 그 전부터도 많았다. 군인들이 일부 생존자들에게 다 잊고 머물러 살라고, 더 이상 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했지만, 두려움에 시리아나 요르단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증언도 있다. 한 주민은 “그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한 짓을 어떻게 잊고, 어떻게 그들에게 마음을 열고 정말로 믿을 수 있겠어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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