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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영세중립(10.26)

입력
2018.10.26 04:33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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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영세 중립 헌법을 소개한 1955년 11월 4일자 관보.
오스트리아 영세 중립 헌법을 소개한 1955년 11월 4일자 관보.

1955년 10월 26일 오스트리아의 영세 중립 노선을 명시한 의회 헌법이 제정됐다. 1항 자발적 영세중립(permanent neutrality of its own accord) 선언에 이은 2항에서 의회는 “앞으로 영원히 어떠한 군사동맹에도 가담하지 않을 것이고 영토 내 어떠한 외국군 기지의 설립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앞서 5월 수도 빈에서 2차대전 연합국 미국과 소련, 영국, 프랑스 대표단이 체결한 오스트리아 독립조약에 따라 자유 주권 민주국가의 재건 지원을 받기 위한 자발적 선택이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소련의 조건이었다. 소련은 연합군 철수 이후 오스트리아가 영세중립을 선언하겠다는 약속을 전제로 저 조약에 서명했다. 서방으로서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북쪽 체코와 독일, 동쪽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남쪽의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를 둔 오스트리아가 중립국이 되면, 동서의 정치ㆍ군사적 완충지가 될 수 있었다.

1차대전의 시동을 건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패전 후 제국 위상을 상실하고 영토 대부분을 이웃 국가에 할양당했다. 지금의 좁은 영토 위에 18년 제1공화국을 수립했지만 34년 파시스트 정권이 탄생했고 38년 나치 독일의 병합으로 국가 자체가 사라지기도 했다. 2차대전 종전 후 연합군은 55년까지 10년간 오스트리아를 분할 통치했다. 그 굴레에서 벗어날 유일한 길이 영세중립국이었고, 1955년의 오늘은 영토 내 외국 군대가 사라진 첫날이었다.

영세중립국의 권리와 의무는 스위스의 영세중립 승인조약인 1815년의 빈 조약(영, 프, 오,프로이센)과 1907년의 헤이그 국제평화회의의 육전법규 등 일련의 국제협상과 조약을 통해 정치해졌다. 오스트리아는 교전국 군대의 영토 진입 자체를 거부ㆍ격퇴해야 하고, 전시 교역도 원칙적으로는 못한다. 군대를 둘 순 있지만 철저히 자위ㆍ평화 목적으로 운용돼야 한다. 실제로 스위스는 2차대전 연합국과 독일의 영토 진입을 무력으로 저지한 예가 있다.

1차대전기 미국의 ‘중립주의’처럼 일시적 중립도 있고, 스웨덴처럼 조약 없이 중립노선을 고수하며 국제적 인정을 받는 경우도 있고, 러ㆍ일전쟁기의 대한제국처럼 ‘혼자’ 중립을 표방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그 중립은 스스로 힘이 있거나, 힘 있는 나라의 지원을 받을 만큼 지정학적으로 아주 뜨겁거나 차가워야 가능하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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