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노예계약’ 논란 후에도 가요 기획사들 갑질 여전
아이돌 그룹활동 2년 넘게 하고 수익금 한푼도 받지 못해
더이스트라이트 폭로 사례처럼 연습생 상습 구타하기도
한 5인조 아이돌 그룹은 2015년 데뷔 후 2년 넘게 활동을 하며 수익금을 단 한번도 나눠 받지 못했다. 무대 위에서 열심히 노래 부르고 춤을 췄지만 아무런 금전적 대가를 얻지 못한 셈이다. 소속사 대표는 오히려 큰 소리 쳤다. “말을 듣지 않으면 업계에서 매장하겠다” “멤버를 교체하겠다”란 식으로 그룹 멤버들을 위협했다. 멤버들은 굶기 일쑤였다. 소속사 대표는 “한 끼 안 먹는다고 안 죽어”란 말을 하며 식비 지원조차 하지 않았다. 그룹 멤버들은 법원의 도움을 받고서야 지난 6월 소속사와의 계약을 끝낼 수 있었고, 소속사 대표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돈 떼이고 폭언 듣는 것은 예사. K팝 산업에서 인권 침해가 속출하고 있다. 2008년 ‘동방신기 13년 노예 계약 논란’이 인 뒤 불공정 계약 풍토가 일부 바뀌긴 했지만, 소속 가수에 대한 가요기획사의 폭력적인 행태는 여전하다. 방탄소년단의 활약을 계기로 세계에서 ‘문화혁명’으로 주목받고 있는 K팝의 감춰진 민낯이다. K팝이 부정적인 이미지 확산을 막고 더 높은 도약을 하기 위해선 후진적인 스타 양성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획사 ‘폭력 갑질’ 여전한 21세기 K팝
2016년 데뷔한 6인조 아이돌 록밴드 더이스트라이트(소속사 미디어라인엔터테인먼트) 사례는 K팝의 인권 사각지대를 여실히 드러낸다. 더이스트라이트의 리더이자 드러머인 이석철(18)은 19일 서울 종로구 변호사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017년까지 2년 넘게 지하 연습실, 녹음실 등에서 야구 방망이와 철제 봉걸레 자루 등으로 엎드려뻗쳐를 당한 상태로 프로듀서 A씨로부터 엉덩이를 여러 차례 상습적으로 맞았다”고 폭로했다. 폭행 이유는 밴드 멤버들의 지각 등 사소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석철의 동생이자 더이스트라이트의 베이시스트인 이승현도 지난해 A씨로부터 몽둥이로 머리와 엉덩이를 맞아 허벅지와 엉덩이 등에 피멍이 들었다. 축구를 했다는 이유로 스튜디오에 갇혀 폭행을 당했다는 이승현은 전치 20일 진단을 받았다. ‘통증과 부종으로 보행이 어려웠다’는 게 주치의의 진단 소견이었다. 더이스트라이트 멤버들의 평균 나이는 16.7세다.
◇“말 듣지 않으면 내쫓겠다”… K팝의 시대역행
이석철의 법률대리인인 정지석 변호사에 따르면 A씨의 폭행은 ‘교육’이란 그릇된 명분에서 이뤄졌다. 이석철은 A씨의 폭력을 “멤버 전원이 (경찰에) 신고하고 싶었으나 두려움에 참았다”고 말했다. “회사에서 ‘말을 듣지 않으면 내쫓겠다’고 지속적으로 협박해서”란 설명이었다. 폭행이 벌어진 미디어라인엔터테인먼트는 1990년대 김건모를 비롯해 클론과 박미경 등을 발굴한 유명 프로듀서 김창환 회장이 세운 회사다.
기획사의 ‘폭력 갑질’이 가능한 것은 수요와 공급의 극단적인 불균형 때문이다. 국내에 등록된 연예기획사는 1,700여 개이고, 연예인 지망생은 100만 여명으로 추산된다. K팝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아이돌을 꿈꾸며 가요기획사에 연습생으로 들어가는 이들의 나이는 점점 낮아지고 있다. 스타가 되고 싶은 청소년은 많은데, 등용문은 좁디 좁다.
연습생에게 기획사는 절대권력이다. 데뷔가 기획사의 손에 달려 있어서다. 연습생의 인권이 짓밟히기 쉬운 주종관계다. 연습생 대부분이 청소년이다 보니 기획사의 폭력적인 행태에도 적절히 대처하기 어렵다. 인기가 있어도 기획사의 위압적 행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5년째 활동 중인 유명 가수 B는 최근 소속사와 계약이 끝나 최종 정산을 하는 데 돈 한푼 받지 못했다. 소속사가 B의 활동 지원비를 계약서에 멋대로 책정한 후 B에게 줄 돈이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아이돌은 회사가 육성해 데뷔까지 시키다 보니 수직적 관계가 강화된다”며 “‘위기 관리’를 구실로 한 억압으로 아이돌의 인권이 경시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이돌 입장에선 소속사와 맞서 싸우기도 부담스럽다. 이미지가 실추될 뿐 아니라 소속사와 법적 분쟁을 벌이면 나중에 새로운 기획사에 둥지를 틀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돌 그룹 두 팀을 기획한 한 가요기획사 대표는 “기획사가 많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이 서로 안면 있는 대표와 매니저들이고 기존 회사에서 나와 새 회사를 차리는 식이라 네트워크가 연결돼 있다”며 “특정 연예인의 정보 등이 알게 모르게 공유된다”고 말했다.
◇K팝 부정적 이미지 강화 우려
가요기획사의 폭력적 행태는 K팝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강화할 우려가 크다. 해외 언론은 ‘음악을 수출품으로 만든 제작사의 기획으로 길러진 소년과 소녀들’(2011년 프랑스 일간 르몽드)이라거나 ‘K팝 노예계약과 성로비는 한류의 그늘’(2012년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이라며 K팝의 어두운 이면을 주시해 왔다. 중국에서 투자를 받아 한국과 중국에서 활동할 남성 아이돌 그룹의 데뷔를 준비 중인 국내 한 가요 기획자는 “이번 일(더이스트라이트 폭행 사건)은 어렵게 되살아난 K팝 한류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라고 말했다.
미성년자들이 몰리는 가요기획사에 연습생들의 인권 실태 조사 및 감독이 더욱 강화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힘을 얻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지난해 5월부터 올해 8월까지 연습생 등의 법률 상담은 75건이 이뤄졌다. 기획사의 무리한 금전 요구나 계약 불이행에 대한 고소ㆍ고발 관련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현행법상 연예기획사는 대중문화예술기획업체로 의무적으로 등록해야 한다. 연습생에 교육비 명목으로 돈을 받을 땐 학원으로도 등록해야 한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교육부 등 유관 부처가 연습생 인권 보호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구조다. 김헌식 동아방송대 교수는 “가요기획사의 연습생 교육 및 관리 행태 감시를 의무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책적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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