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민석 교수의 성경 속 이야기] <52> 성서 동양의 것, 하지만 국수주의 아닌 보편주의
예수는 백인일까? 우리가 자주 보게 되는 성화 속 예수는 주로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백인이다. 서구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기독교를 전파하였다 보니, 옛 어른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양놈의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고 욕하기도 했다.
예수는 지금의 중동지역에서 태어나신 분이다. 백인일 리가 없다. 유명한 영화 ‘십계’(1956)에서 모세의 역할을 맡은 배우도 아쉽지만 금발을 휘날리던 찰턴 헤스턴이었다. 그 영화에서 그나마 현실에 가장 가까웠던 배우는 이집트의 파라오 역할을 했던 율 브리너다. 그는 머리 색이 상관없는 대머리였다. 그래서 근간에 멜 깁슨이 만든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에서는 현실성을 감안하여 배역들을 모두 검은 머리 배우들로 등장시켰다. 몇 학자들이 역사적 실제성을 감안하여 재구성한 예수의 가상 얼굴을 보면, 꼭 서울 이태원의 중동 음식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주방장처럼 생겼다.
성서의 지리적ㆍ역사적ㆍ문화적 배경이 되는 지금의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은 아시아에 속한다. 그곳을 유럽에서는 자기네와 가까운 ‘근동’(Near East)이라 불렀고, 우리 입장에서 보자면 ‘서아시아’(West Asia)다. 지금의 중동 및 범 아랍권에 속한다. 그래서 사실 성경을 잘 알려면 중동을 잘 알아야 한다. 아쉬운 것은 한국과 서구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종교적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 주변 민족의 문명을 터부시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을 제외하곤 대부분이 이슬람을 믿는 아랍권 국가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서는 이 아랍권 역사와 문화의 병풍 안에 그려져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성경의 배경은 중동이었을까? ‘왜’라는 질문 자체가 역사 발생적으로는 적절치 않다. 그러나 그럴듯하게 생각해 보자면, 중동은 지리적으로 가장 보편의 위치라 할 수 있다. 중동 위에는 유럽, 아래에는 아프리카, 동쪽으로는 아시아가 위치해 있으며, 이 세 대륙이 서로 맞닿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중동 지역 사람들의 외모도 세 인종의 종합처럼 보인다. 유럽 백인의 얼굴형이 살짝 보이지만, 머리카락은 아프리카 흑인처럼 조금은 곱실거리고, 피부는 아시아의 황인이 선탠을 과하게 한 듯 해 보인다. 그야말로 세 대륙과 인종을 다 아우르는 곳이 중동이다.
성경의 배경을 공부하기 위해서 만이 아니더라도, 중동의 고대 문명은 큰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있다. 서구의 문명 발달을 이야기 할 때, 주로 그리스의 헬라 문명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편적 이해이기는 하지만 사실 여기에는 살짝 감춰져 있는 것이 있다. 유럽은 사실 이슬람의 찬란한 문명을 공식적으로 혹은 슬그머니 배워와 자기의 것으로 차용한 것이 아주 많다.
중세 때 라틴어로 적힌 많은 학술 서적은 치밀하게 살펴보면 본래 아랍어로 적힌 글을 라틴어로 번역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꽤 있다. 엄밀히 보자면 표절이다. 역사학과 지리학을 비롯하여 철학, 천문학, 수학, 물리학, 화학, 의학, 연금술 등 서구 유럽이 아랍 문명에 빚지지 않은 게 없을 정도다. 기독교를 근간으로 한 서구의 문명이 이슬람의 아랍권에게 크게 의존하였다는 것을 애써 숨기고 싶어 했던 것일까? 고대 서아시아 학자들의 식견으로는 심지어 그리스의 문명도 중동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많아 보인다. 그래서 이제는 유럽 안에서도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처럼 서구에서 꽃 핀 기독교와 성경, 그리고 과학은 그 기원이 오리엔탈이다. 기독교가 오랫동안 서구에서 발달하다 보니, 성경에 대한 연구도 지나치게 서구화 되어있기도 하다. 특히 계몽주의 시대 이후, 인간 이성에 대한 지나친 낙관주의는 성서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숭상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런데 오리엔탈의 경전인 성경이 본래 그렇게 읽혀지기 위한 것이었을까?
사실 고대 이스라엘부터 이어온 유대교의 성경 읽기는 우리 동양의 경전 읽기와 매우 유사하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학교인 예시바에서 성서를 읽는 모습은 우리네 서당에서 아이들이 천자문을 읽는 것과 닮았다. 유대인들이 몸을 앞뒤로 흔들어 가면서 성경을 소리 내어 읽고 또 읽는 것처럼, 우리네 서당에서는 아이들이 앉아 몸을 옆으로 흔들며 천자문 읽기를 했다. 동양의 경전 읽기 방법론은 반복적 읽기(chanting)와 암송, 묵상이라 할 수 있다. 문헌의 내용을 잘 이해하던 못하면 일단은 무조건 그 내용을 내면에 각인시킨다. 그리고 인생을 살다 보면, 그래서 삶의 우여곡절을 겪다 보면, 내면에 내재된 경전의 ‘음성’이 불현듯 어떤 자각을 들려준다. 그 교훈은 분석하고 연구해서 얻은 것이라기보다는, 우연 같으면서도 운명 같은 신묘한 조우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사실 성경 읽기도 그와 같은 오리엔탈 경전 읽기 방식으로 습득되어야 하는 것이 본래 취지에 가깝다.
서구에 이어 이제는 한국을 비롯한 동양권에서 기독교는 다시금 부활하고 있다. 본래 오리엔탈이었던 성서가 다시금 오리엔탈로 돌아가 본래의 읽기 방식을 되찾을 기회다. 안타깝지만 아직은 한국의 성서학 연구가 유럽의 분석적인 성서 연구 전통에 깊이 의존하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의 성서 연구가, 성서를 동양의 경전 읽기 방식으로 풀어보는 진취적 시도를 해 볼 것이 기대된다.
이렇게 동양적인 성서이지만, 성서가 기독교 선교의 날개를 타고 세계 이곳 저곳으로 전파가 되면 ‘토착화’의 귀재가 된다. 어느 지역으로 가든지 그 지역의 토착 문명으로 쉽게 탈바꿈하는 것이다. 성경은 늘 기독교가 전파된 그 지역의 언어로 언제나 자유롭게 번역되어 읽힌다. 같은 중동 지역에서 기원한 이슬람의 경전 코란의 경우, 반드시 아랍어로 읽혀야만 그 영감이 손상되지 않는다고 여겨진다. 번역된 코란은 이미 영감이 훼손된 것으로 본다. 매우 보수적인 문자 근본주의다. 하지만 성경은 기독교 선교의 열성과 함께 전 세계 각국 언어로 번역되었다. 진보적인 토착화 성향은 기독교 전파에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심지어 기독교 성서의 주인공인 예수도 ‘맞춤형’ 구세주가 되었다. 1879년, 중국에서 그려진 어느 예수의 모습은 중국인이다. 한국의 화백 운보 김기창이 그린 많은 성화 속에서도 예수는 삿갓을 쓰고 있다. 아프리카 교회에 걸려있는 많은 성화 속 예수는 당연히 까만 피부의 흑인이다. 예수 또한 성경과 함께, 선교의 사명아래 어디에 전해지든 그곳 토착의 모습으로 변모한 것이다.
구약성경은 얼핏 국수주의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될 때, 이미 만민 보편주의의 비전이 제시되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살고 있는 땅과, 난 곳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기 12:3)
신약성경이 말하는 예수의 죽음도, 이로 인해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이 허물어 졌다는 것에 진중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에베소서 2:14-16)
기독교 성경의 전체적 의미에서 보자면, 하나님 자신이 인간을 위한 맞춤형이었다. 신은 인간을 위해 ‘성육신’하였다 한다. 신이지만 신의 모습을 버리고 자신을 인간에게 맞추었다는 것이다. 신에서 인간으로,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인간에서 희생양으로 자신을 허물어 맞추었다. 성경의 토착화는 하나님의 성육신에서 배워 온 것이 아닐까?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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