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조현병과 함께 살아온 50년, 난 늘 평범한 삶을 갈망했다”

입력
2018.11.01 04:40
수정
2018.11.01 19:44
6면
0 0

[조현병, 공존의 질병으로] 윤석희 한국정신장애연대 회장

윤석희 한국정신장애연대 회장은 중증정신질환자들 사이에서 ‘서바이버(Survivorㆍ생존자)’로 불린다. 배우한 기자
윤석희 한국정신장애연대 회장은 중증정신질환자들 사이에서 ‘서바이버(Survivorㆍ생존자)’로 불린다. 배우한 기자

화를 못 이겨 주먹으로 유리창을 내리쳤다. 산산이 부서져 흩어진 유리조각들, 그 한가운데 주저앉은 어머니는 피투성이가 된 열아홉 살 딸의 손을 붙잡고 하염없이 울었다. “북괴가 나를 잡아가려 한다”는 망상과 환청에 시달리고 자해를 반복하는 딸이 집안에 있다는 사실은, 교사 어머니마저 무당을 찾아가 굿을 하게 만들었다.

윤석희(70) 한국정신장애연대 회장에게 조현병(당시는 정신분열증으로 불렸다)이 찾아온 건 1966년. ‘당장이라고 죽을 것 같은 기분’을 공황장애라고 명명할 지식조차 없던, 조현병에 ‘무지하던’ 시절이다. “가족들이 다 서울대를 나왔는데 나는 서울대에 못 갔어요. 그게 마음의 돌덩이가 되었던 모양이죠. 19세 때 처음 병증이 찾아왔고, ‘정신분열’이라는 진단이 내려진 게 24세였어요.”

◇열 아홉에 발병… 서른 일곱 “어떻게든 세상에 나가자”

23세 때 첫 입원을 했다. 30번이 넘는 전기치료와 입ㆍ퇴원이 반복됐다. 서른두 살에 마지막으로 퇴원을 했으니, 20대는 그저 지리멸렬한 병과 싸운 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37세가 됐을 때, 더 이상 이렇게 바보같이 살아선 안되겠다 싶었어요. 어떻게든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습니다. 가장 기초적인 사회활동부터 시작하자, 해서 도맡은 게 당시 살던 아파트의 ‘반장’이었습니다.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고 그냥 관리비 받으러 다니고 그랬죠.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게 차차 발을 내디디니 더 밖으로 나가고 싶어지더라고요.”

공부가 하고 싶었지만 의사들이 말렸다. 중증정신질환자가 뇌를 혹사시키면 병증이 더 악화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마지막으로 가톨릭대 의대를 나온 오빠 친구를 찾았다. ‘공부가 너무 하고 싶다’는 호소에 ‘네 의지가 그렇다면 어디 한번 해봐라’는 답이 돌아왔다. ‘의사가 해도 된다니까’, 그 길로 영어학원을 등록했다. 늦깎이로 시작한 공부는 3년 뒤 대학원 입학, 또 4년 뒤 대학강사 임용이라는 기적 같은 일상으로 이어졌다. “논문을 쓰려면 남들보다 몇 배 시간이 걸렸고, 수업을 하다 갑자기 공황장애가 오기도 했어요. 그래도 당시 대학에서 그걸 이해해줬기 때문에 10년이나 강의를 할 수 있었어요.”

‘평범한’ 삶에 대한 갈망은 결혼으로 이어졌다. 45세의 만혼. 하지만 강의도 모자라 가정을 돌보는 어머니 역할까지는 그에게 무리였다. 5년 후 합의 이혼. “그래도 결혼 생활이 재활에 큰 도움이 됐어요. 식사를 준비하고 돈을 규모 있게 쓰고 가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 인간으로서 ‘성숙’하게 된 것이죠.”

10년간 강사 생활을 마치고 50세 때부터는 남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조력자가 되기로 마음먹고 국립서울병원, 고양정신병원, 수원 정신보건센터 등에서 집단 상담자로 활동했다. 한국정신장애연대 회장을 맡아 다른 환자를 위한 권익 옹호에도 앞장섰다.

◇“사랑받고 사랑하며… 꾸준히 약 먹고 친구 사귀세요”

윤 회장은 중증정신질환자들 사이에서 ‘서바이버(Survivorㆍ살아남은 사람)’로 불린다. 그는 무엇보다 ‘사랑’을 강조한다. “환자를 미워하지 마세요. 잘못을 해도 세 번 칭찬하고 한 번 지적해야 해요. 그래야 환자들이 용기를 갖고 재활 의지를 가질 수 있습니다.” 윤 회장에게 사랑의 근원은 어머니다. 열아홉 살 딸의 피투성이 손을 붙잡고 울던 어머니는 딸이 47세 되던 해, 78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한결 같은 마음으로 딸을 지지했다.

지금껏 약을 한번도 거르지 않고 먹어왔지만, 그렇다고 증상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환청과 망상은 32세 때 사라졌지만 공황장애는 50세까지 이어졌다. 요즘에도 인지기능장애, 불안, 우울을 겪기도 한다. 한번 이를 닦을 때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듯한’ 기분이 드는 강박증상 때문에 양치에 3시간이 걸릴 때도 있다. 그래도 그는 현재 자신의 삶을 ‘평범한 노인의 삶’이라고 부른다. 적당히 고독하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하고.

일각의 편견과 달리 중증정신질환자도 재활을 통해 얼마든지 비장애인들과 어울려 살아나갈 수 있다는 것을 윤 회장은 당당하게 증명한다. “인간이 얼마나 존엄한데요. 왜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사실 하나가 그이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어야 해요? 사랑하고, 사랑 받으세요. 꾸준히 약을 먹고 나가서 친구를 사귀세요. 부디, 평범하고 행복해지세요.” 윤 회장의 삶이 말한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