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리와 수지는 이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머리를 비운다고 한다. 파스텔처럼 아련하게 번지는 선율에 추억에 푹 빠지게 하는 감성적인 노랫말이 날 선 마음을 토닥이는데 제격이다. 이효리는 지난 봄 제주 집 거실에서 박보검과 소녀시대 윤아를 앉혀 놓고 이 가수의 노래 ‘이화동’을 틀어(JTBC 예능프로그램 ‘효리네 민박2’) 망중한을 즐겼다. 수지는 이 가수의 신곡 뮤직비디오까지 출연했다. 그에게서 받은 곡 ‘꽃마리’를 지난해 낸 솔로 앨범에 담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다. 이효리와 수지의 귀를 사로 잡은 주인공은 에피톤프로젝트. 차세정(34)이 홀로 꾸리는 1인 밴드다.
유희열이 홀로 이끄는 토이의 인디 버전이라고 할까. 차세정은 유희열의 뒤를 잇는 감성 뮤지션으로 입소문이 났다. 초기 앨범 ‘긴 여행의 시작’(2009)과 ‘유실문 보관소’(2010)도 1만장 넘게 팔아 치웠다. 단 한 번의 TV 출연 없이 홍익대 인디음악 신에서 활동 하던 시절이었다. 음악을 시작한 지 10년이 넘어서면서 위상도 높아졌다. 1,000석 규모의 연세대 백주년기념관에서 사흘 연속(12월 14~16일) 공연하는 가수가 됐으니 ‘인디’라 하기에는 멋쩍다.
“자괴감에 빠져 패잔병처럼” 뒤늦게 찾아온 홍역
차세정이 4집 ‘마음속의 단어’를 지난 4일 냈다. 2014년 낸 3집 ‘각자의 밤’ 이후 4년 만에 낸 신작이다. ‘첫사랑’으로 시작해 ‘자장가’로 끝나는 앨범은 밀레의 그림처럼 평화롭다. 차세정은 타이틀곡 ‘첫사랑’을 프랑스에서 썼다. 최근 서울 중구 한국일보에서 만난 차세정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남녀가 둘이 쓰기엔 작은 우산을 쓰고 함께 걷는 모습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며 웃었다. 동반자에 우산을 거의 내 준 남자의 어깨 한쪽은 다 젖어 있었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로 시작해 현악이 포개진 이 곡은 쓸쓸하지만 따뜻하다.
차세정은 2016년 여름 카메라를 챙겨 유럽으로 훌쩍 떠났다. “익숙함에 젖다 보면 도통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홀로 떠난 여행길이 외롭지만은 않았다. “찾아올 수 있겠어요?” 그는 당시 프랑스 작은 마을에 머물던 이병률 시인을 찾아가 정을 나누기도 했다.
프랑스와 영국 등에서 넉 달을 이방인으로 산 뒤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새 앨범 작업엔 좀처럼 속도가 붙지 않았다. 차세정은 “1년을 패잔병처럼 지냈다”고 회상했다. ‘내가 음악인으로서 가는 이 길이 맞나’란 고민에 쌓여 곡이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밖에선 수지 등이 작곡 의뢰를 해 와 분주해 보였지만, 안은 텅 빈 기분이었다고. 음악 작업은 고통스러웠다. 차세정은 “자괴감까지 들었다”고 고백했다. 방법이 없었다. 그는 결국 다른 계절의 바람이 불어오길 기다렸다. 신작의 실마리를 찾은 건 어느 날 선잠에서였다.
“원래 주제를 잡고 앨범을 만드는 데 이번엔 너무 주제가 안 잡히는 거예요. 그런데 선 잠에서 깨고 보니 ‘마음속의 단어들’이 떠오르더라고요. 현몽처럼요. 쫓기듯 살다 보면 내 원래 감정이 뭔가 모르고 지나칠 때가 많잖아요. 잊고 살던 내 색깔과 감정을 복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른’의 무게 생각하다….”
어쩌다 보니 갖게 된, 자신을 돌아본 시간은 신작의 거름이 됐다. 지나간 기억은 생생하기만 한데 새로운 경험은 무감각할 때 인생이 시시해진다고들 하지만, 그는 반대였다. 어떤 촉감을 좋아했고, 어떤 단어에 마음이 저미었을까. 차세정은 ‘소나기’와 ‘나무’ 등 마음속의 단어를 꺼내 멜로디를 엮었다. 나를 다시 채우다 보니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위로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지 어른인 척하는 일이”. 차세정은 어른의 무게에 대해 생각하다 ‘어른’이란 곡을 만들었다. 다들 힘들고, 아픈 마음 감추면서 살고 있지만 그러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거라는 특별할 것 없지만 괜찮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어서였다. 차세정은 앨범 속지에 바람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 앨범이 지난밤 꾸었던 어느 꿈처럼 그렇게 남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익선동’ 도전해볼까요?”
사람마다 특별한 장소가 있기 마련이다. 어느 중년이 지금의 한남대교 (옛 제3한강교)를 보며 혜은이를 떠올린다면, 옛 골목의 정취를 즐기는 어떤 젊은이들은 벽화마을이 있는 이화동에 가 차세정을 떠올릴지 모른다. “우리 두 손 마주잡고 걷던 서울 하늘 동네 좁은 이화동 골목길 여긴 아직 그대로야”. 드라마와 예능프로그램에 이화동이 나오면 단골 배경음악이 ‘이화동’이다. 그에게서 새로운 거리 찬가를 기대할 수 있을까.
“하하하, 전에 익선동 관련 곡을 만들까 생각해보다 말았거든요. 너무 ‘이화동’ 2탄 같아서. 그럼 다시 한번 해볼까요?”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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