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 진전 속도를 두고 한미가 엇갈린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가 ‘남북관계는 비핵화와 결부돼야 한다’며 속도 조절을 주문한 당일, 조윤제 주미 한국대사는 ‘기계적으로 같은 속도로 움직일 수는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해리스 대사는 17일 아산정책연구원이 서울 종로구 연구원에서 미국 싱크탱크 우드로윌슨센터와 공동 주최한 전문가 좌담회에서 기조연설을 통해 “문재인 대통령과 현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고 운을 뗀 뒤, “남북관계는 (북한) 비핵화와 연결돼야 하고 한국과 미국의 목소리는 일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발언은 북한의 비핵화 진전에 비해 남북관계 진전 속도가 빠르다는 미 조야의 우려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유럽 순방 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대북제재 완화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띄우고, 12월 초까지 동ㆍ서해선 철도ㆍ도로 연결 착공식을 갖기로 하는 등 남북 경협을 서두르는 데 대해 공개적으로 속도조절을 주문했다는 것이다.
해리스 대사는 “북한 문제에 대해 (한미가) 공동의 목소리로 접근해야 평양, 판문점, 싱가포르에서 했던 약속들을 현실화할 수 있다고 믿는다”며 “지속적인 동맹의 힘”을 강조했다. 제10차 한미 방위비분담특별협정 협상과 관련해서는 “양국 정부가 빨리 협상을 끝내야 중요한 업무, 비핵화를 향해 함께 나아갈 수 있다”며 우회적인 압박을 하기도 했다.
같은 날 미국 워싱턴에서 조윤제 대사는 다소 결이 다른 목소리를 냈다. 그는 현지시간으로 16일 세종연구소와 미국외교협회(CFR)가 공동으로 주관한 ‘서울-워싱턴 포럼’에 참가해 기조연설을 통해 “남북관계와 비핵화가 항상 기계적으로 같은 속도로 움직일 수는 없다”고 역설했다. “남북관계 진전은 비핵화 과정에 따라 진행돼야 하며 그 과정에서 국제 제재를 충실하게 이행한다는 것이 정부 입장”이라는 전제가 달리긴 했으나, 남북관계 발전에서 미국 의중과 다른 결정을 낼 수도 있음을 명시적으로 밝힌 것이다.
조 대사는 이어 “남북관계가 북미협상보다 조금 앞서나갈 경우 한국이 레버리지(지렛대)를 갖고 촉진자 역할을 해, 북미 협상 정체를 풀어내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며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계속 실험, 확인해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북한의 추가적 조치를 유도해내고 김정은 국무위원장 본인이 직접 대외적으로 공약한 사항들을 현실화시켜 나가는 데 총력을 경주하는 것이 최선의 접근”이라고 강조했다. 남북미 간에 신뢰가 쌓여야 비핵화에 속도가 붙을 것이라는 논리다. 문제는 제재 완화를 둘러싼 미 행정부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반응이 우리 정부와는 온도 차가 있다는 점이다. 자칫 한미 공조에 균열만 생기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청와대는 한미 간 마찰 우려 목소리에 날선 반응을 보였다. 김의겸 대변인은 이날 기자들을 만나 “일부 언론이 철도(연결)를 두고 한미 공조에 이상이 있고 균열이 생긴 것처럼 보도했다”는 점을 언급하며, “한미 공조에 대해 노심초사하는 우국충정은 알겠으나 이제 그만 걱정은 내려놓으십시오”라고 격앙된 모습을 보였다. 다만 ‘착공식에 대해 한미 이견이 전혀 없다는 뜻인가’라는 질문에는 “부부 사이에도 아이들 진학 문제, 집 문제 등으로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이혼하지는 않는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이와 관련 조태열 유엔주재 대사는 16일(현지시간) 주유엔 대표부에서 열린 국회 외교통일위 국정감사에서 철도ㆍ도로 연결 사업이 안보리 대북제재에 위반되느냐는 정병국 바른미래당 의원의 질의에 “본격적으로 진행되면 위반 소지가 있는 요소들이 있을 것”이라며 “(다만) 지금은 착공을 하겠다는 것이지, 하겠다는 게 아니다. 프로세스가 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올해 유엔 대북인권결의안 채택 문제와 관련해 “채택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한편 웨인 에어 유엔군사령부 부사령관은 이날 아산정책연구원 좌담회에서 “빈센트 브룩스 사령관이 나에게 준 첫 임무 중 하나가 유엔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리면서 (유엔사에 대한) 오해를 해소하라는 것”이었다며 “비핵화를 비롯해 항구적 평화를 나아가는 과정에서 유엔사는 걸림돌이 아닌 조력자로서 당사자들과 협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는 8월 유엔사 제동으로 남북 철도 연결을 대비한 현지 공동조사가 무산됐던 것을 의식한 발언으로 보인다.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정지용 기자 cdragon2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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