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에 다니는 손예지(33ㆍ여)씨는 요즘 오후 6시 정시 퇴근한 뒤 회사 근처 백화점으로 간다.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열리는 제빵(베이킹) 강좌를 듣기 위해서다.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전엔 야근과 회식으로 점철됐던 저녁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된 덕분이다. 손씨는 “늘 제빵을 배우고 싶었지만 평일엔 시간이 없어서, 주말엔 집 근처에 마땅한 학원이 없어서 실천하지 못했다”며 “52시간 근무 시행으로 내 시간이 생기자마자 회사에서 가기 편한 문화센터에 등록했다”고 말했다.
퇴근 후 문화센터로 향하는 이른바 ‘문센족’ 직장인은 손씨만이 아니다. BC카드가 16일 빅데이터 분석기업 다음소프트와 함께 직장인 생활패턴 변화를 분석한 결과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된 7월 이후 문화센터 매출액이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분석은 20~50대 BC카드 사용자의 지난해 및 올해 카드결제 자료를 바탕으로 문화센터, 어학원, 미술ㆍ피아노, 운동 등 자기계발 관련 4개 업종에서 발생한 매출액 변화 양상을 파악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지난해 7월~올해 9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수집된 데이터를 통한 자기계발 관련 소비 분석도 병행됐다.
분석 결과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 전인 올해 상반기(1~6월)엔 이들 4개 업종 중 운동 업종의 증가율이 전년 대비 25.9%로 가장 높았지만, 제도 시행 이후인 3분기(7~9월)엔 문화센터 업종의 매출액 증가율이 27.1%로 최고였다. 상반기 문화센터 매출액 증가율(17.2%)과 비교하면 10%포인트 가까이 급증한 수치다. 반면 미술ㆍ피아노 업종 매출액 증가율은 상반기 10.0%에서 3분기 5.4%로, 운동은 25.9%에서 18.6%로 5~7%포인트가량 줄었다.
문화센터에 대한 선호도는 SNS 데이터 분석에서도 확인된다. 다음소프트가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SNS에서 발생한 키워드 중 자기계발과 관계된 것을 선정한 뒤 각 키워드의 언급 횟수가 전체 자기계발 관련 키워드 언급 횟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계산한 결과다.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 이전인 지난해 7월부터 올해 6월까지는 학원(92%), 도서관(5%), 문화ㆍ주민센터(3%) 순으로 언급량이 많았던 반면, 7~9월에는 문화ㆍ주민센터(21%)의 언급 비중이 7배나 늘었다. 반면 학원은 60%로 줄었다.
연령대별로 보면 젊은층일수록 자기계발 업종에서 쓴 돈이 크게 늘었다. 올해 7~9월을 기준으로 전년동기 대비 자기계발 관련 소비 증가율이 높은 연령대는 20대(34.8%)와 30대(20.3%)였다. 반면 40대는 7% 상승에 그쳤고 50대는 오히려 1.6% 감소했다.
이런 결과는 이른바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ㆍ일과 삶의 균형)’ 추구 경향이 강한 젊은층이 늘어난 저녁시간을 자기계발 등에 쏟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특히 문화센터는 도심 복판에 위치한 백화점이나 대형마트 내에 있어 접근성이 좋고 일반 학원보다 저렴한 수강료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접할 수 있어 젊은 직장인을 중심으로 선호도가 높아진 것으로 분석된다. BC카드 관계자는 “7월을 기점으로 문화센터 업종에서의 지출이 다른 업종보다 큰 폭으로 증가했다”며 “젊은층의 자기계발 업종 지출과 워라밸 언급량이 지속적으로 늘고 있는 만큼 당분간 이들을 중심으로 자기계발 분야가 각광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유통업계도 이에 맞춰 저녁시간 강의를 늘리며 ‘칼퇴근 직장인’ 잡기에 적극 나선 상태다. 신세계백화점은 가을학기 워라밸 관련 강좌 비중을 지난 학기보다 10~15%, 롯데백화점은 50% 이상 확대했는데 직장인 인기 강좌는 일찌감치 마감됐다. 홈플러스도 가을학기 저녁시간대 워라밸 강좌 수강생이 전년 대비 47% 늘었다고 밝혔다.
허경주 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