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이 금융, 법률, 유통, 채용에 이어 신약개발 영역까지 넘보고 있다. 사람 힘으론 신약이 될 만한 후보물질을 수년 걸려도 찾아낼까 말까 한데, 인공지능은 단 몇 초 만에 발굴해낸다. 제약 시장의 판도가 확 바뀌는 건 시간문제다.
SK바이오팜은 SK㈜ C&C와 함께 국내 최초로 인공지능(AI) 기반의 ‘약물설계 플랫폼’ 개발을 완료했다고 15일 밝혔다. 지난달 1일부터 사내 연구실에서 활용 중인 이 플랫폼으로 SK바이오팜은 뇌전증(간질)과 수면병, 알츠하이머병(치매) 등 중추신경계 질환 치료제와 항암제 개발 속도를 크게 앞당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오경석 SK바이오팜 디지털헬스케어 태스크포스팀 수석은 “AI의 도움으로 시행착오는 줄고 새로운 아이디어는 늘면서 신약개발의 생산성과 효율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SK의 AI 약물 설계 플랫폼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뤄진다. 약물이 체내에 들어갔을 때 어떻게 흡수되고 배설되는지, 독성은 얼마나 나타나는지 등 생리적 특성이나 작용 기전을 예측하는 부분과 약물의 전체 구조를 그려내는 부분이다. 연구원이 개발하려는 약물에 대해 원하는 정보를 입력하면 플랫폼이 스스로 수많은 약물 구조를 설계한 다음 각각의 생리적 특성을 평가해 입력된 정보에 가장 적합한 구조를 10가지 이내로 뽑아 연구원에게 제안한다.
이명진 SK C&C AI아키텍트유닛장은 “정보 입력 후 AI 시스템이 최적의 약물 구조들을 제안하기까지 단 몇 초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연구원은 실험을 통해 이들의 효능과 안전성 등을 확인하고 최종 신약후보 물질을 정한다. 후보물질 하나를 찾기 위해 보통 수년에 걸쳐 40~50가지 구조를 일일이 만들어 실험해야 하는 기존 신약개발 과정과 비교하면 시간과 비용이 크게 줄어든다.
지금도 제약사나 바이오기업에선 특정 화학물질의 약효를 예측하는 소프트웨어를 연구개발에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소프트웨어는 연구원이 입력한 물질을 구조나 효능 등이 이미 알려진 기존 약물들과 통계적으로 비교 분석한 결과를 보여줄 뿐 AI처럼 새로운 약물 구조를 설계하지는 못한다.
SK의 AI 약물 설계 플랫폼은 온라인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용 화학물질 데이터베이스와 SK바이오팜 내부의 화학물질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해 3,000만여 건에 달하는 물질의 구조별 특성과 효능 등을 ‘심층 학습’(딥 러닝)했다. 이를 바탕으로 체내에서 필요한 작용을 할 수 있는 새로운 구조를 자체 고안할 수 있게 고도화한 것이다. 구글의 바둑 AI ‘알파고’가 프로 기사들의 수많은 기보를 학습한 뒤 스스로 경기를 펼칠 수 있게 된 것과 마찬가지다.
해외에선 이미 AI를 이용한 신약개발을 위해 유명 정보기술(IT)기업과 제약기업이 속속 손을 잡았다. 다국적제약사 얀센은 영국 AI기업 베네볼렌트와 함께 루게릭병을 비롯한 난치병 치료제를 찾고 있고, 미국 IBM은 자사의 AI 시스템 ‘왓슨’을 이용해 다국적제약사 화이자와 함께 새로운 면역항암제를 개발 중이다. 이 유닛장은 "왓슨은 주로 연구논문으로 학습을 한 반면 우리 시스템은 화학물질 데이터로 학습했다”며 “상호 협력한다면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SK바이오팜과 SK C&C는 AI 약물 설계 시스템을 국내 다른 제약사들과 공유하는 방안도 논의하고 있다. AI가 한국이 세계적으로도 경쟁력을 갖춘 분야인 만큼 우리나라 바이오산업 성장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양사는 기대하고 있다.
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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