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에게 영어 구사 능력은 기본이다. 하지만 우리 외교부에서는 외교관의 영어 실력이 심심찮게 구설에 오른다. ‘부족한 영어 실력이 탄로날까 두려워 배석자 없이 외국 손님을 만났다는 외교관’ ‘주요국 장관 앞에서 준비한 메모만 읽었다가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로 찍힌 외교 장관’ 등 영어 실력을 둘러싼 흑역사가 즐비하다. 최근에는 “한국의 국격과 국력에 비해 외교관의 영어 실력이 너무 부족하다”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불호령이 떨어져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고 한다.
▦강 장관의 지적에 정치권까지 가세해 논란이 번졌다. 이준석 바른미래당 최고위원은 “비(非)외무고시 출신 장관의 외교부 군기 잡기 아니냐”고 꼬집었다. 하지만 외교관의 영어 실력 강화를 주문하는 외교부 수장을 나무랄 수 없다는 반론이 더 우세했다. 마침 정가에서 강 장관의 영어 능력을 공인하는 에피소드가 회자되면서 비판론을 잠재웠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과 통화에서 “영어 잘 하는 당신의 외교 장관을 TV에서 봤다. 그 사람을 자주 보내 설명을 하면 좋겠다”는 말을 전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외교관 출신의 장부승 일본 간사이외국어대 교수가 이의를 제기했다. 외시에 합격한 뒤 15년간 외교부에서 일하다 학계로 옮긴 장 교수는 “(본부 서기관이나 과장만 되면) 매일 읽어야 하는 전문 등 문서가 몇백 페이지는 족히 된다. 복잡하고 방대한 내용을 신속히 읽고 핵심을 짚어 내는 과정 모두 우리말로 한다”며 외교 현장의 실상을 전했다. 영어가 좋은 외교관이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준은 아니라는 게 장 교수의 주장이다.
▦강 장관이 국정감사에서 5ㆍ24조치 해제 검토를 입에 올렸다가 ‘지독한 자질론’에 휩싸였다. 지난해 국감에서도 자질론 시비가 있었지만 본격적인 비핵화 국면 이전이라서 별 탈 없이 지나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통역관 출신으로 영어 능력 외에는 검증된 게 없다’는 혹독한 비판이 나오고 있다. 무릇 외교 장관이라면 영어 능력뿐 아니라 세밀한 정세 분석과 신중한 정무적 판단을 갖춰야 한다는 지적일 것이다. “외국어는 양질의 정세분석과 평가를 위한 수단이지 외교관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 자국 언어와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라는 장부승 교수의 말에 강 장관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
김정곤 논설위원 jk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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