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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연기자도 근로자" 판결... 처우 개선 길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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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연기자도 근로자" 판결... 처우 개선 길 열려

입력
2018.10.13 04:4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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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드라마 출연료 미지급액. 그래픽=강준구 기자
국내 드라마 출연료 미지급액. 그래픽=강준구 기자

“구두계약이나 촬영 후 계약으로 출연료 못 받는 일 없어지겠죠?”

단역배우 A씨는 최근 지상파 방송의 한 드라마 촬영을 끝냈지만 아직 출연료를 받지 못했다. 외주제작사가 만든 이 드라마가 아직 방송사의 편성이 잡히지 않아서다. 보통 편성이 잡히지 않은 드라마는 배우와 출연료 계약을 할 때 ‘방영 중 익월 말에 지급’ 조건으로 체결한다. 드라마가 편성되지 않아 방송사 곳곳을 기웃거리게 되면서 A씨의 출연료 받기는 기약할 수 없는 일이 됐다. 만약 드라마가 16부작으로 11월초 방영을 한다고 해도 A씨는 계약 조건 상 12월말에나 출연료를 받을 수 있다. 드라마 방영이 끝난 뒤다. 누가 봐도 불공정한 거래다. A씨는 “또 출연료가 미지급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라며 “나에겐 생존이 달린 문제”라고 하소연했다.

A씨의 걱정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질 법원 판결이 나왔다. 방송연기자도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노동조합법)상 근로자로, 별도 단체를 구성해 출연료 등을 교섭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다.

대법원 3부(주심 조희대 대법관)는 12일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한연노)이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낸 교섭단위분리재심결정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를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1988년 설립된 한연노는 탤런트와 성우, 코미디언, 무술연기자 등 방송연기자 4,400여명이 가입한 노조다. 이들은 2012년 KBS와 출연료 협상을 진행하던 중 중앙노동위원회가 “연기자들은 노동자가 아니다”며 별도의 단체교섭 자격을 인정하지 않자 이에 불복해 소송을 냈다.

방송연기자의 근로자성에 대한 하급심의 판단은 엇갈렸다. 1심은 ▦연기자들이 특정 방송국에 전속되지 않고 프로그램별로 자유롭게 출연계약을 맺는 점 ▦근로소득세 징수 대상도 아닌 점 등을 근거로 노동조합법상 근로자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2심은 1심을 뒤집고 원고 승소를 판결했다. 재판부는 “방송출연자들의 연기는 연출감독 등이 만족스럽다고 판단해야 비로소 방송프로그램의 일부를 구성하게 되며, 그 과정에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지휘ㆍ감독을 받는다”며 “출연료는 연기의 예술적 가치를 평가한 것이라기보다 노무제공 자체의 대가”라고 판단했다. 또 “약 25년간 노동조합법에 따른 법률관계가 이미 형성돼 정착됐고, 피고도 원고가 노동조합법상 노동조합임을 전제로 노동쟁의 조정절차를 진행해 왔다”고 덧붙였다.

대법원은 2심의 판단을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일반적 근로자와 다른 측면이 있더라도, 방송연기자들로 하여금 노동조합을 통해 방송사업자와 대등한 지위에서 교섭할 수 있도록 할 필요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을 계기로 그동안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되지 않았던 노무종사자들도 일정한 경우 노동조합법상 근로자로 인정받아 노동3권을 적법하게 행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판결의 의미를 설명했다.

송창곤 한연노 대외협력국장은 “연기자를 노동자가 아니라 자영업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노동법 안에서 보호 받기가 힘들었다”며 “이제 노동조합법 상의 근로자로 인정받았기에 연기자들의 촬영 현장에서의 기본권 및 인권 등을 개선하기 위해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방송연기자가 근로자성을 인정받으면서 노동조합을 통해 각 방송사들과 합리적인 계약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됐다. 그동안 불합리한 계약으로 고통 받는 방송연기자들이 많았다. 가령 지상파 방송의 아침드라마에 출연하는 경우 120부작이면 30~40부작 정도를 촬영한 뒤 계약을 맺는 게 다반사다. 매번 선택을 받아야 하는 연기자 입장에선 방송사나 제작사가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제시해도 받아들여야 했다. 한연노는 이를 시정하기 위해 단체협약을 통해 ‘선(先)계약 후(後)촬영’ 조건을 제시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지난 7년 여간 지상파 방송사들이 한연노와의 단체협약을 거부하면서 더 이상 개선의 여지가 없었다.

연기자들이 법의 보호를 제대로 못 받으니 출연료를 받지 못하는 일도 허다했다. 한연노에 따르면 지난 2009년부터 현재까지 지상파 방송 3사에서 배우들이 받지 못한 출연료 미지급금이 32억원에 이른다.

드라마뿐만이 아니다.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료 문제가 이어지고 있다. 90~100분 가량 방송되는 지상파의 한 예능프로그램은 출연자들에게 60분 분량에 대해서만 출연료를 지급해왔다. 심지어 촬영한 분량이 편집되면 출연료 절반만 지급되기도 했다.

송창곤 국장은 “방송사에 의해 일방적으로 폐지된 SBS 예능 프로그램 ‘웃찾사’의 경우 개그맨들은 모두 생계 활동을 할 수 없게 됐다”며 “만약 제대로 된 계약을 체결해 방송했다면 개그맨들이 어느 정도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연노는 이번 대법원의 판결로 인해 방송계가 불공정한 관행을 없애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시스템이 정착되기를 바라고 있다. 송 국장은 “아직까지도 방송연기자나 스태프들이 방송사나 외주제작사와 계약을 할 때 문서로 계약한 적이 없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이번 판결이 ‘선계약 후촬영’ 시스템이 자리 잡는 계기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지난 2013년 7월부터 문화체육관광부가 마련한 표준출연계약서가 있지만 권고사항이라 지켜지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받은 게 아니어서 여전히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할 순 없지만 최소한 노동3권이라도 보장받을 수 있다는 데 만족하는 분위기다. 송 국장은 “주 52시간 근로시간이 지켜지는 건 아니라도 밤샘 촬영은 이제 없어져야 한다. 두 시간만 자고 나오는 등의 일은 이제 살인 방조나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방송연기자가 근로자성을 인정받으면서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방송스태프들의 처우 개선도 주목 받고 있다. 지난 6월 희망연대 방송스태프노조가 출범해 스태프들의 실상을 대변하고 있다. 한 방송스태프는 “근로시간이나 체불임금 등 최소한의 생존권이 보장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 지상파 방송의 실무관계자는 “그동안 미뤄졌던 방송사와 한연노 간의 출연료 협상 등 단체협약을 현실에 맞게 재정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최동순 기자 doso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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