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3m가 넘는 거대한 나무벽에 둥글게 홈이 파여 있다. 그 앞에 서면 다양한 내용의 녹음된 문장들이 귀를 간질인다. 개인과 사회, 나와 세계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문장을 들은 뒤 입안에서 맴도는 하나의 문장을 글로 쓴다. (안규철의 ‘세상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다’)
#2. 알록달록한 둥근 모양의 어구와 먹다 버린 페트병, 각종 플라스틱 물놀이 장난감 등이 한데 뒤엉켜 있다. 옆에는 이 해양쓰레기들이 발견된 위도와 경도가 적혀 있고, 이들이 떠다닌 경로도 지도에 표시돼 있다. (정재철의 ‘크라켄-또 다른 부분’)
예술과 공유가 만났다. 안규철의 설치작품은 다른 이가 녹음한 소리를 듣고, 이를 글로 표현하고, 다시 이를 녹음해 다른 이에게 연결하는 ‘공유재로서의 예술’을 탐색한다. 정재철의 설치작품은 우리 삶의 공유지인 바다에서 예술의 역할을 묻고 있다.
올해 개관 10주년을 맞은 경기 용인 백남준아트센터가 11일부터 선보이는 ‘#예술#공유지#백남준’전은 예술과 공유의 관계를 모색하는 작가 12명(팀)의 작품들로 꾸려졌다. 비디오를 통해 세상을 연결하고, 공유하고자 했던 비디오아트의 거장 백남준(1932~2006)의 정신을 잇는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으로 예술과 공유의 관계를 다양하게 탐구한다.
전시는 백남준의 작품으로 먼저 시작한다. 전시장 입구에는 축음기, 스피커, 전화기, 텔레비전 등 미디어 기기가 가득 실린 수레를 끌고 가는, 나무로 만든 큰 코끼리가 설치돼 있다. 코끼리와 수레는 케이블 전선으로 서로 이어진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영상 등 미디어 기기가 갖고 있는 이 정보는 전선을 타고 코끼리가 이끄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전시를 기획한 이수영 학예사는 “작품은 축음기에서 텔레비전 등으로 기술의 발달에 따라 정보가 확산되는 것을 의미한다”며 “전 세계인이 미디어로 역사와 경험, 기억 등을 공유할 수 있게 되면서 미디어는 일종의 문화와 역사의 공유재가 됐다”고 설명했다.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도 예술 공유지로서의 위성방송 시스템을 보여준다. 미국 뉴욕과 프랑스 파리의 아파트 방처럼 꾸며진 공간에 놓인 텔레비전에서는 뉴욕과 파리에서 진행되는 예술가들의 공연 영상이 실시간으로 나온다.
이어 공유재로서의 예술을 표현한 동시대 작가의 작품이 이어진다. 남화연 작가의 24분16초짜리 영상 ‘임진가와’는 온라인에서 우연히 듣게 된 일본 노래 속에서 ‘임진강’이라는 노랫말을 듣고 흥미를 느껴 노래를 추적하는 과정을 찍은 것이다. 노래는 일본 교토의 조선학교에서 우연히 들은 ‘림진강’ 노래를 기억한 일본인이 일본어로 만든 곡이다. 이후 포크 밴드가 노래를 불렀고, 노래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노래 원곡에 대한 논란이 불거졌다. 일본 내 재일본인조선총연합회(조총련)가 저작권을 주장하면서 금지곡으로 지정됐다. 이 논란에 곡의 인기는 더 높아졌고, 인터넷으로 더 빨리 확산됐다. 노래 한 곡이 다양한 경험과 시각이 축적된 공유재인 셈이다.
가장 대표적인 공유지는 도시다. 전시장 2층 중앙에 설치된 두 개의 대형 스크린에는 독일 창작공연집단인 리미니 프로토콜의 ‘100% 광주’와 ‘100% 암스테르담’이 마주한다. 이들은 도시라는 물리적 공간을 공유하는 시민들이 어떤 특성이 있는지 탐구한다. 각각 1시간 40여분간 상영되는 영상은 인구, 성별, 나이 등 두 도시를 구성하는 통계 수치를 대변하는 시민 100명을 추려 이들에게 도시와 관련된 다양한 질문을 던지고, 어떻게 답하는지 관찰한 작품이다. 예컨대 광주 인구 중 외국인 비율은 1%에 불과하다. 작품에 참여한 100명 중 1명만 외국인으로 구성됐다. 암스테르담 내 외국인의 국적은 100개가 넘는다. 작품에는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이 무대에 올랐다. 이런 점이 그 도시의 특성을 드러낼 수 있는지 예술은 묻는다.
경제위기로 텅 빈 스페인 도시 외곽의 아파트를 점유한 예술가의 모습을 찍은 파트 타임 스위트의 ‘부동산의 발라드’, 공유 공간인 하늘을 4개의 비디오카메라를 사용해 전시장에 담아낸 박이소의 ‘오늘’, 인터넷상에서 우리가 쓰는 글과 이미지 등 데이터를 기업이 아닌 개인 단체가 공유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언메이크랩의 ‘데이터 유니온 만들기’, 디지털상에서 가상의 신념을 공유하도록 유도하는 싱가포르 작가 히만 청의 ‘나는 믿고 싶다’ 등도 예술을 어떻게 공유하고, 공유지로서 예술의 역할은 무엇인지에 관해 다방면으로 탐색하는 작업들이다.
전시의 대미는 세 명의 작가로 구성된 옥인 콜렉티브의 ‘The more, The better(다다익선)’의 영상으로 마무리된다. 아트센터 10주년을 맞아 예술작품의 탄생 이후 변형과 노화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가 주제다. 작품 보존과 복원을 둘러싼 논쟁이 한창인 백남준의 ‘다다익선’을 통해 예술의 의미를 찾아보려는 취지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전시돼 있는 ‘다다익선’은 작품을 구성하는 모니터가 고장 나는 등 원형을 잃어 보존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작가들은 작가가 작품을 생산했지만, 그 이후 작품 소유권은 누구에게 있는지, 예술에는 수명이 있는지, 작품을 보존하는 방식은 어때야 하는지 등에 대해 논의를 확장한다. ‘예술은 사유재산이 아니다’라고 했던 백남준의 말을 곱씹게 된다.
예술을 공유하기 위한 이론적, 실천적 방안에 대한 심포지엄과 시민들의 참여로 완성하는 메타뮤지엄 프로젝트 등도 함께 진행된다. 서진석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은 “21세기 미술관이 새로운 기능과 역할, 가치를 모색할 시점”이라며 “시민들과 함께 예술을 공유하는 장으로서의 미술관을 만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2008년 10월 개관 이후 10년간 아트센터에서는 571명의 작가가 참여한 84종의 전시와 퍼포먼스가 이뤄졌고, 152만2,000여명이 다녀갔다. 전시는 내년 2월 3일까지.
강지원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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