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만 해도 공부나 업무의 필수 과정이었던 종이에 연필로 무언가를 쓰는 행위가 이제 ‘취미’로 여겨지는 시대다. 모바일 시대로 빠르게 변화하면서 노트와 펜은 점차 스마트 기기와 스타일러스 펜으로 대체되고 있다. 액정 위에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뿐 아니라 마우스 커서와 ‘셀카봉’ 역할까지 하는 등, 스타일러스 펜은 손가락만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다양한 기능을 갖추게 됐다.
‘스타일러스 펜’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 수첩처럼 쓰인 왁스 메모장을 긁는 도구를 칭하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종이가 없었던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나무에 밀랍을 얇고 매끈하게 바른 뒤 그 위를 긁어 기록했다. 1980년대 전자수첩과 개인용정보단말기(PDA) 등이 출시되면서 스타일러스 펜은 전자기기 보조도구로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당시만 해도 화면을 누르는 역할만 하면 됐기 때문에 일반 볼펜이나 손톱, 심지어 젓가락으로도 대체 가능했다.
2007년 스티브 잡스는 “이제 아무도 스타일러스 펜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역설적으로 아이폰 출시는 스타일러스 펜 업계를 통째로 바꿔놨다. 그때까지 널리 사용되던 ‘감압식’ 디스플레이 대신 손가락에 흐르는 미세한 전류를 인식해 위치를 계산하는 ‘정전식’ 디스플레이가 전자기기의 주류가 됐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스타일러스 펜도 앞쪽에 플라스틱 대신 전도성 고무나 탄소섬유를 달아 전보다 터치감과 내구성이 좋아졌다.
최근 대중에게 가장 익숙한 스타일러스 펜은 삼성전자가 2011년부터 출시한 갤럭시노트 시리즈에 사용되는 ‘S펜’과 애플이 2015년 아이패드 프로와 함께 출시한 ‘애플펜슬’이다. 두 가지 펜 모두 기존 정전식이 아닌 특별한 방식을 채택해 펜 터치의 정확성을 아날로그 펜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전자기공명(EMR) 방식 사용하는 S펜
삼성전자의 S펜은 작고 가볍다. 내부에 따로 배터리를 넣거나 전류 발생 장치를 넣지 않아도 되는 ‘전자기공명(EMR)’ 방식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EMR은 스타일러스 펜 시장과 기술을 거의 독점하고 있는 일본 정보기술(IT)기업 와콤이 개발한 방식으로, 펜이 가볍고 힘 조절만으로도 굵은 선과 얇은 선을 모두 표현할 수 있어 디자이너 등 그래픽 태블릿 사용자들에게 인기 있는 방식이다. 삼성전자는 처음부터 와콤과 전략적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S펜 개발을 함께해왔으며, 2013년 와콤의 지분을 일부 매입하기도 했다.
EMR 방식을 따르는 스타일러스 펜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호환되는 특별한 패널이 필요하다. S펜은 삼성전자 갤럭시노트나 태블릿PC, 노트북 등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유리와 디스플레이만으로 이루어진 일반적인 패널과 달리, EMR 스타일러스 펜과 호환되는 모델에는 디스플레이 아래 ‘디지타이저’라고 부르는 별도 패널이 한 층 더 깔린다. EMR 펜 속에는 돌돌 말린 구리 코일과 무선 주파수(RF) 발생 장치가 들어간다.
펜을 작동시키기 위해 EMR 방식은 전자기 유도 원리를 사용한다. 패널 아래 디지타이저에 방향이 수시로 변하는 교류(AC)를 공급하면 패널 주변으로 변화하는 자기장이 형성되는데, ‘자기장이 변하는 공간에서는 전류가 형성된다’는 패러데이의 전자기 유도 법칙에 따라 가까이 다가온 펜 속 코일에 전류가 흐르게 된다. 에너지를 공급받은 펜은 펜 내부 회로를 통해 디지타이저가 인식할 수 있는 특정 RF를 발생시키고, 이 신호를 수신한 디지타이저는 신호의 위치와 세기 등을 계산해 디스플레이에 표시한다. EMR은 이 작업을 1초에 수백 번 반복해 펜의 움직임에 따라 끊이지 않고 화면에 위치를 표시할 수 있게 한다.
EMR 방식의 최대 장점은 펜에 배터리를 내장하거나 충전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펜이 직접 패널에 닿지 않아도 펜이 자기장 구역 안에만 있다면 마우스와 같은 기능을 할 수 있는 ‘호버링’ 기능이나, 펜의 RF 신호와 손바닥의 터치 신호를 각각 구분해 손바닥 압력은 무시하는 ‘팜 리젝션’ 기능 등을 갖춰 기존 정전식 스타일러스 펜에 익숙했던 사용자들에게 ‘신세계’를 보여줬다. 유도전류를 사용하기 때문에 최근 출시된 모델들은 물속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다만 디지타이저가 아래에 깔려 있어야 하는 EMR 특성상 화면 주변부에서 왜곡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으며, 강한 자기장을 뿜어내는 자석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다. 또 패널에 별도 디지타이저가 필요하기 때문에 제품 가격대가 높고 전력 소모가 많을 수밖에 없다.
◇능동정전기(AES) 방식 취한 애플펜슬
S펜보다 늦게 나온 애플펜슬은 EMR이 아닌 ‘능동정전기(AES)’ 방식을 채택했다. EMR처럼 패널로부터 전기를 공급받는 것이 아니라 펜 자체에서 전기를 발생시키기 때문에 ‘능동’ 방식이라고 부른다.
AES 방식은 디스플레이 외 별도의 디지타이저가 필요 없다. 손가락 터치를 인식할 수 있는 기존 정전식 디스플레이 위에서 구동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AES 방식은 펜 자체에 배터리 또는 전기 발생 장치가 내장돼 펜 내부에서 손가락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정전기 신호를 발생시킨다. 디스플레이는 펜에서 발생한 신호의 세기와 위치, 펜에 내장된 센서가 알려주는 펜의 기울기 등을 인식해 가장 정확한 위치를 계산하고 디스플레이에 표시한다. 아이패드 프로의 터치패널은 애플펜슬을 초당 240번 스캔하고 소프트웨어로 보정해 높은 인식률을 보인다.
AES의 가장 큰 장점은 지연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EMR은 전자기공명을 통해 주파수 신호를 수신하기 때문에 약간의 지연이 발생할 수밖에 없지만, AES는 펜에서 발생하는 신호를 바로 받으면 돼 실제 연필을 사용하는 것과 거의 비슷한 느낌으로 사용할 수 있다. 디지타이저가 없으니 디스플레이 배터리가 더 오래가고, 펜이 내보내는 신호를 암호화해 보안성을 높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배터리를 내장해 펜이 무겁고 두꺼워지는 단점이 있다. 애플펜슬의 경우 무게와 디자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끝부분에 충전용 젠더를 달았다. 젠더를 아이패드 프로 등에 꽂아 펜을 충전해 쓸 수 있도록 했는데, 애플에 따르면 15초 충전 시 30분, 15분 충전 시 12시간을 연속으로 사용할 수 있어 사용성에 방해를 받을 수준은 아니다. 같은 AES 방식을 사용하는 서피스 펜의 경우 건전지를 넣는데, 사용 기간이 6개월 정도로 매우 긴 대신에 무겁다. 호버링 기능 등은 블루투스 방식으로 가능하지만, EMR 방식에 비해 가까운 거리에서만 작동한다.
◇진화해가는 스타일러스 펜
처음 출시 당시 256단계 필압만 감지할 수 있었던 S펜은 이제 4,096단계를 표현할 수 있게 됐으며, 최근 출시된 와콤의 태블릿 컴퓨터 ‘모바일스튜디오 프로’에 연동되는 프로 펜2 모델은 무려 8,192 단계의 필압을 지원할 정도로 스타일러스 펜은 진화를 거듭해왔다. 반응 속도 등도 개선돼 일부 모델의 경우 ‘실제 펜을 사용하는 것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최근에는 스타일러스 펜에 다양한 기능이 포함되면서 진화해가고 있다. 올해 8월 출시된 갤럭시노트9의 S펜에는 블루투스 기능이 적용돼 S펜을 10m 밖에서도 리모컨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국내 스타트업 네오랩에서는 특별한 종이에 소형 카메라가 달린 펜으로 필기를 하면 종이에 인쇄된 미세한 패턴을 감지해 필기 내용 그대로를 모바일에 표시해주는 ‘N코드’ 방식을 선보이기도 했다.
스타일러스 펜을 조롱했던 스티브 잡스가 떠난 애플에서도 애플펜슬 활용도를 계속 넓혀나갈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현재 스마트폰 크기가 잡스 시대의 태블릿PC와 거의 비슷해져 스타일러스 펜 사용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현재 애플펜슬은 아이패드 프로에서만 사용할 수 있지만, 업계에서는 이르면 내년 발표될 아이폰 새 모델에서부터 애플펜슬의 신모델을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곽주현 기자 zooh@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