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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비환 칼럼] 신뢰는 문명과 평화의 근본 조건

입력
2018.10.11 11:08
수정
2018.10.11 17:49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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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ㆍ외교와 관련하여 신뢰라는 단어가 요즘처럼 언론에 자주 언급된 적은 드물다. 교육ㆍ고용ㆍ부동산 문제에 대한 정부의 정책이 오락가락해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거나 북미간 신뢰가 형성되지 않아 실질적인 비핵화가 진전되기 어렵다는 등, 신뢰의 결핍이 정치‧외교의 근본 문제라는 지적이 빈번하다.

이런 현상은 두 가지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그 동안 불신이 팽배했던 정치ㆍ외교 관계에서 신뢰가 조금씩 형성되고 있다는 긍정적인 관점에서고, 다른 하나는 관련 당사자들 사이에 신뢰가 충분히 형성되지 않아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어렵다는 부정적인 관점에서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문제의 본질이 신뢰의 부족이고, 신뢰를 쌓아야만 문제해결이 가능하다고 본다는 점에서는 유사성이 있다.

정치ㆍ외교를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에서 신뢰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신뢰가 없으면 지속적이고 평화적인 협동관계를 구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뢰가 결핍된 우정과 사랑은 의심이 파고들어 파탄에 이르기 쉽고, 신뢰를 상실한 국민ㆍ정부 관계는 불신과 강압의 악순환에 빠질 수 있으며, 신뢰가 약한 국가 간 관계는 경계ㆍ위협ㆍ전쟁ㆍ지배의 소용돌이에 갇히기 쉽다. 신뢰의 가치는 우정ㆍ사랑ㆍ부부ㆍ정치ㆍ외교 관계에서 신뢰가 사라질 때 분명히 드러난다. 신뢰가 상실되면 이내 의심ㆍ증오ㆍ적의의 감정이 찾아들기 때문이다.

신뢰는 인지ㆍ의지ㆍ정서 모든 측면에 관련되어 있다. 먼저 인지적 측면은 신뢰의 대상이 신뢰 주체의 믿음을 저버릴 위험이 매우 낮다고 인식하는 상태를 나타낸다. 따라서 화염에 휩싸인 건물을 벗어나기 위해 썩은 동아줄에라도 몸을 맡겨야 하는 의탁의 상황이나, 긍정적인 결과를 전혀 확신할 수 없는 희망과 다르다. 신뢰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강한 확신 및 상대방의 호의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에 우호적으로 행동하려는 의지를 이끌어낸다.

신뢰는 대상에 대한 친근한 감정도 수반한다. 신뢰하는 대상에 대한 감정은 우리가 낯선 곳을 방문한 후 안전하고 편안한 고향으로 돌아올 때 품게 되는 감정과 흡사하다. 이것은 대상에 대해 친근감을 느낄 수 없을 때 그 만큼 신뢰도 약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신뢰는 대상에 대한 우호적인 인식과 의지 그리고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긍정적인 관계구조다.

신뢰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게임이론은 신뢰가 형성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게임이론의 한 가지 사례인 ‘죄수의 딜레마’는 두 명의 공범이 서로 상대방을 믿고 범죄를 자백하지 않을 때 가장 가벼운 형량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신뢰로 인해 발생하는 상호 이익은 신뢰 관계가 형성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다.

지속적인 의사소통도 신뢰를 촉진한다. 대화를 통해 서로를 더 잘 알아갈수록 상대방의 의도를 더 쉽게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간의 손해나 위험을 감수하려는 마음도 신뢰를 발전시키는데 큰 도움이 된다. 서로를 불신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느 한 쪽이 위험을 무릅쓰고 먼저 우호적인 행동을 취할 때 상대방도 호의적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좋은 예다. 이에 덧붙여 베어(A. Baier)라는 학자는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때로 용서의 덕목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어느 한 쪽의 계약파기나 배반은 결국 다른 쪽에 대한 불신의 결과이기 때문에 배신을 한두 번 용서해주면 상대방으로부터 의외의 신뢰를 얻어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신뢰에 관한 지금까지의 설명은 정치ㆍ외교와 관련하여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국민의 신뢰를 잃으면 아무리 좋은 정책도 효과적으로 집행될 수 없고, 북한과 미국 사이에 진행되는 어떤 비핵화 협상도 의미 있는 결실을 얻을 수 없다는 자명한 이치를 되새겨준다. 불신보다는 신뢰가 모든 이해관계자들에게 장기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원리도 확인시켜준다. 나아가 신뢰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우려에 대한 배려 및 과거의 배신에 대한 기꺼운 용서, 지속적인 대화를 통한 상호 이해의 증진, 그리고 상대방의 우호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약간의 모험적인 태도도 필요함을 가르쳐준다.

문명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동의나 합의와 같은 관념들은 신뢰가 전제되지 않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 왜냐하면 이해당사자들이 어떤 사안에 대해 합의에 이르렀다고 해도 모두가 합의를 이행할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먼저 합의를 파기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정치와 시장경제, 그리고 국가간 외교의 원활한 작동은 궁극적으로 신뢰의 유무 및 정도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컨대, 시민들 사이에, 시민과 정부 사이에, 그리고 국가 간 사이에 신뢰를 쌓으려는 노력은 문명생활은 물론 국제적인 평화공존에도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그 형체를 확인하기 어려운 신뢰는 일단 형성되었다가도 약화되거나 소멸될 수 있는 만큼 다양한 협약과 제도를 통해 더욱 공고히 다질 필요가 있다.

김비환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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