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숙 작가가 그러데요. (대사의) 마침표까지 정성을 다해줘서 고맙다고요. 극찬 받았어요.”
8일 서울 청담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이정은(48)은 웃고 있었지만 이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지난달 30일 막을 내린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마지막 회가 떠올랐다. 30여 년간 곱게 키운 양반집 애기씨 고애신(김태리)의 품에 안겨 죽음을 맞이한 함안댁이 바로 그다. “빗속에서 울던 갓난 애기가 내 품에 와가, 첫 발을 떼고 세상 환하게 웃고. 그거 지켜보는 게 제가 살아가는 이유였어예. (중략) 이래 얼굴 봤으니...훠이 훠이…춤 추면서 가볼…” 함안댁은 눈을 감는 순간까지 애신을 향한 모정을 읊조렸다. 낳지는 않았지만 키운 정이 더 깊었다. 숨소리 하나 놓칠 수 없는 진한 여운을 남긴 장면이었다. “너무 많이 울어서 NG를 여러 번 냈다”고 했다. 시청자도 울면서 그를 보냈다.
이정은의 가슴 먹먹한 연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tvN 드라마 ‘아는 와이프’에서도 빛을 발했다. 배역부터 어려웠다. 갑작스럽게 남편을 잃고 심하게 우울증을 앓다가 끝내는 치매에 걸린, 우진(한지민)의 엄마였다. 그는 오락가락하는 정신 속에서도 딸 우진에겐 한 없이 따뜻한 엄마가 됐고, 사위 주혁(지성)을 누구보다 아끼는 장모로 열연을 펼쳤다. 드라마 막바지에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과거로 간 시간여행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나 신선한 충격을 줬다. 치매 환자인 줄만 알았던 여인이 남편 사진을 바라보며 한 대사는 눈물을 쏙 빼게 만들었다. “나 잘했지 여보? 그때 내가 조금만 더 빨랐어도 당신을 구할 수 있었는데…”
깊은 모정과 사투리 연기는 이정은의 강점이다. 푸근한 인상으로 경상도 전라도 등 완벽한 지역 사투리를 구사하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시골 아낙네 같다. 그러나 여기에 반전이 숨어 있다. 그는 아직 미혼이고 서울 토박이다.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해 1991년 연극 ‘한여름 밤의 꿈’으로 데뷔해 줄곧 연극과 뮤지컬 무대에서 활동했다. 영화나 드라마에 눈을 돌린 건 불과 5년 전이다. “연극할 때 안내상 설경구 이문식 선배들이 있었는데 영화나 방송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어요. 부러웠었죠. 그 때는 제가 못할 장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기회는 찾아왔다. 영화 ‘전국노래자랑’(2013)으로 “카메라 울렁증을 극복”한 뒤 영화 ‘변호인’(2013)에 출연했다. 우석(송강호)이 찾아간 옛집 주인 역할, 단역이었다. 한쪽 눈에만 화장을 한 채 “쥬씨 드실랍니까?”하는 단 한 장면이었지만 강렬했다. “신기하게도 이 영화로 방송가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MBC 드라마 ‘여왕의 교실’(2014), tvN 드라마 ‘고교처세왕’(2014)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그러던 중 ‘고교처세왕’의 유제원 PD와 양희승 작가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영화 ‘사랑과 영혼’ 속 우피 골드버그 같은 역할이 있는데 어떠시냐”는 거였다. 바로 tvN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이다. 단역도 아닌 조연이었다. 욕 잘하는 서빙고 보살 역이었다. 이정은은 이 역할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정은이라는 이름을 대중에 각인시켰다. ‘신스틸러’라는 수식어도 붙었다.
실제로 황태술 처(영화 ‘택시운전사’), 부인회 회장(영화 ‘군함도’), 용화 처(영화 ‘보안관’), 덕기 처(영화 ‘곡성’), 운동원 아줌마(영화 ‘검사외전’), 화순댁(영화 ‘미안해 사랑해 고마워’), 계산원1(영화 ‘카트’) 등 단역을 전전하던 그에게 꿈 같은 일이었다.
“엄마나 아줌마, 누구의 처 등 이름이 없는 배역을 많이 했어요. ‘미스터 션샤인’도 함안댁이었으니 이름이 없죠. 하지만 그런 이름 없는 분들이야말로 이 세상을 이루는 중요한 지점이라고 봐요. 배우로서 그분들이 조명 받을 수 있도록 더욱 애를 쓰려고요.”
작품 선택에도 의미가 있는 걸까. 사회적 약자들을 품었던 ‘변호인’ ‘택시운전사’ ‘카트’ 등을 비롯해 일제의 참상을 알린 ‘군함도’ ‘미스터 션샤인’에 출연한 걸 보면 남다른 기준이 있는 듯 보인다. 이정은은 “한 번은 어떤 촬영감독이 ‘너무 그런 작품만 출연하는 것 아니냐’고 묻더라”며 “학생 때 데모를 많이 해서 그런가?(웃음) 조국이라는 말만 들어도 조금씩 뜨거워진다”고 했다. “한쪽에서 소리를 내고 있는 분들이 있는데 무시할 순 없다”는 거다. 그래서 사회에 “좋은 영향력을 미치는 배우”고 되고 싶단다. 그게 “배우의 책무”란다.
요새는 ‘함블리’라는 새로운 별명에 놀랐다고 했다. “귀엽고 예쁘게 봐주신다는 거니 남성 팬들도 많아졌으면 해요(웃음). 이게 사회적인 변화가 아닐까 싶어요. 여성들의 기운이 높아지면서 저 같이 듬직하고 적극적인 여성상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닐까요.”
강은영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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