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장 17시간에 걸쳐 타오른 경기 고양시 저유소 기름 탱크 화재는 어이없게도 한 외국인 근로자가 날린 풍등(風燈)이 원인인 것으로 드러났다.
경기 고양경찰서는 8일 오후 4시쯤 중실화(重失火ㆍ중대한 실수로 불을 냄) 혐의로 스리랑카 국적의 A씨(27)를 긴급 체포해 조사하고 있다. A씨는 7일 오전 저유소 인근 강매터널 공사장에서 불씨가 있는 풍등을 날려 저유소에 화재를 일으킨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은 사고 현장 주변 폐쇄회로(CC)TV 분석 결과 A씨가 날린 풍등이 대한송유관공사 저유시설 잔디밭에 떨어지며 불이 붙은 것을 확인했다. 이 공사장은 저유소에서 1km 이내에 있다. 풍등은 등 안에 고체 연료로 불을 붙여 뜨거운 공기로 하늘을 나는 소형 열기구로 바람을 타고 저유소까지 날아온 것으로 추정된다.
경찰은 풍등 불씨가 잔디에 떨어져 불이 났고, 이때 불씨가 저유탱크 유증 환기구에 들어가 탱크 내부로 옮겨 붙으면서 폭발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A씨 풍등이 잔디밭에 떨어진 뒤 불이 나는 장면을 CCTV를 통해 포착했고, 국과수도 상당부분 분석을 끝냈다”고 말했다.
A씨는 경찰에서 “호기심에 공사장 인근 문구점에서 풍등을 구입해 날렸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비전문 취업비자로 입국해 화재 현장과 500m가량 떨어진 강매터널 공사장에서 근로자로 일해 온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은 “A씨를 상대로 구체적인 사건 경위를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사건 경위는 9일 오전 브리핑을 통해 밝힐 예정이다.
이에 따라 대량의 휘발유를 보관하고 있는 저유시설의 안전관리 실태를 전면 조사해야 한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실화 등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된 사실이 드러난 데다 방재 시설도 부실했다. 고양 저유소는 국가 중요시설로 지정돼 있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화재 당시 소화장치 고장으로 초기 진압에 실패한 것으로 확인됐다.
대한송유관공사는 이날 “폭발로 저유조 덮개(콘루프)가 날아가 저유소 내 폼액 소화장치와 충돌하면서 소화 시설이 정상 작동 못했다”며 초기 진화 실패 이유를 설명했다. 폼액 장치는 폭발 사고 시 폼액을 분사해 화재를 막는 소화설비다. 폭발 여파로 날아간 덮개가 떨어지며 소화설비 장치 두 개 중 하나가 망가졌고, 또 다른 장치도 폼액 설비가 찌그러지며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번 불로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탱크에 저장된 휘발유 440만ℓ 중 266만ℓ가 불에 타 43억5,000만원의 재산피해가 났다. 인근 10여개 유류저장탱크로 옮겨 붙는 최악의 사태는 면했지만 발생 17시간이나 지난 이날 오전 3시58분쯤 겨우 완전 진화되면서 유해 물질에 대한 주민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강태우(48)씨는 “주민들은 유독물질 배출 공포에 떨고 있는데, 정작 안전 매뉴얼조차 없다”며 “그냥 앉아서 당하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이동명 경민대 소방안전관리학과 교수는 “화재 진화 당시 유류 진압용 폼 소화약제를 대량 살포했던 만큼 인체 유해물질이 상당량 배출됐을 것”이라며 “유류저장시설에 대한 화재 예방과 점검이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양시는 경기도보건환경연구원에 사고 지역의 대기질 측정을 의뢰하기로 했다. 고양시 관계자는 “주민들이 유해물질 유출에 따른 피해를 우려하고 있어 사고 현장 주변 대기에 실제 유해 물질이 측정되는지 확인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이종구 기자 minjung@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