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핵화 협상에 나선 북한이 첫 북미 정상회담 직전인 5월 풍계리 핵실험장을 부수고 9월 평양 남북 정상회담 합의문을 통해 동창리에 있는 미사일 엔진 시험장과 발사대도 없애버리겠다고 약속한 건, 핵을 포기하겠다는 자신들의 말이 진심이니 믿어달라며 취한 일방적 행동이었다. 그래서 미국에 요구한 반대급부도 없었다.
그러나 미국에는 이미 쓸모 없거나 낡아 용도 폐기된 시설로 ‘쇼’를 한다고 여기는 이들과 필요할 때 다시 복구해 쓰려고 제대로 폐기하지 않았을 거라고 의심하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때문에 북한 입장에서 비핵화ㆍ평화체제 협상을 한발이라도 더 진척시키려면 이 같은 미 조야의 의구심을 해소하는 것이 급선무다.
이런 상황에서 핵 사찰단이 곧 북한을 방문하게 될 거라는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8일 언급은 이미 북한이 해치웠거나(풍계리) 실천하겠다고 공약한(동창리) 핵 폐기 행동과 포개지면서 중대한 의미가 만들어진다. 미답의 ‘폐기 검증’ 영역에 들어서게 되기 때문이다. 아직 북핵 협상은 전(前) 단계인 ‘신고 검증’ 문턱도 넘어본 적이 없다. 물론 사찰단 복귀 사실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크기는 하다. 2009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이 추방된 지 9년 만이라는 점에서다.
폼페이오 장관이 7일 평양에 들어가 확실히 합의한 건 일단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사실의 검증인 것으로 보인다. 앞서 미 국무부가 공개한 사찰 합의 대상도 풍계리에 한정된다. 다만 폼페이오 장관이 8일 수행 기자단 대상 브리핑을 갖고 의전ㆍ수송 등 사전 절차 실행 계획이 합의되는 대로 사찰단이 풍계리 핵실험장과 미사일 엔진 시험장(동창리 소재 시설로 추정)을 방문하게 될 거라고 설명한 만큼, 사찰 대상과 범위가 늘어날 가능성도 작지 않다.
특히 풍계리에서 첫 단추를 잘 꿰면 영변 핵시설을 포함한 전반적 북핵 능력의 검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전문가들은 이번 사찰 합의를 긍정적으로 보는 분위기다. 홍민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번에 합의된 사찰 조치는 풍계리만 해당하는 단수(單數) 조치가 아니라 일련의 복수 조치일 공산이 크다”며 “맨 먼저 폐기 작업이 이뤄진 데다 사찰 작업이 상대적으로 용이한 풍계리부터 복기하며 검증의 모양새를 갖춰간다는 데 북미가 합의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과거 협상을 공전시키다 끝내 깨뜨리고 만 핵시설ㆍ핵물질ㆍ핵무기 목록 신고 과정에 바로 들어가는 대신 그 전에 ‘폐기→검증’의 반복을 통해 신뢰를 견고하게 구축할 시간을 마련한다는 점도 긍정적 요인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6ㆍ12 정상회담 뒤 미군 전사자 유해 송환처럼 핵과 무관한 조치로만 신뢰를 쌓아 온 북미가 풍계리와 동창리 시설 폐기ㆍ검증을 통해 비핵화 관련 초기 신뢰를 형성할 경우 후속 비핵화 협상에 상당한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영변 핵시설과 핵물질ㆍ핵무기 등 난도(難度)가 더 높은 폐기ㆍ검증, 나아가 비핵화 과정 전반에 동력이 제공되는 셈”이라고 했다.
신중론 및 회의론이 없는 건 아니다. 워싱턴의 한 외교 소식통은 “영변 핵시설 폐기ㆍ사찰과 상응 조치에 합의하고 나왔어도 모자란 마당에 합의 사실로 동창리 엔진 시험장 폐기 참관보다 후퇴한 풍계리 핵실험장 참관 정도만 공개했다는 건 이번에도 폼페이오 장관이 손에 들고 나온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의 방증”이라며 “11월 중간선거 전까지 표를 노린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허세를 부리는 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 서울의 다른 소식통은 “비핵화 조치들을 잘게 쪼개 시간을 끌겠다는 북한의 의도가 풍계리 참관이라는 퇴행으로 관철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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