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1794)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당대 기독교회로부터 호된 공격을 받았다. 그는 이민족의 침입으로 로마가 멸망한 것은 맞지만, 그 전에 교회가 번성하면서 헌금 등으로 제국의 문화와 재정, 특히 군단 조직이 와해했다고 평가했다. 교회가 선전하는 ‘기적’이란 것도 과장됐다며 중세 성직자들의 권위도 넌지시 부정했다. 기독교적 세계관의 거푸집에 갇힌 기존 역사에 대한 반감과 기번 자신의 종교에 얽힌 수난사도 작용했겠지만, 그래서 근년에는 로마사학계의 진지한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어쨌건 그는 시대적 한계 속에서 사료 연구와 고증에 근거해 최대한 진실을 쓰고자 했다. 종교의 힘이 전 같지 않던 계몽주의 시대여서 가능한 서술이었다.
영국의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기번은 아버지의 강권으로 15세에 옥스퍼드 모들린칼리지에 입학했지만 “술과 편견(port and prejudice)에 찌든” 옥스퍼드의 학자들에게 실망, 혼자 신학 서적들을 탐독해 스스로 국교회(성공회)를 버리고 가톨릭 신자가 됐다. 국교도만 공직자가 될 수 있던 때였다. 기겁한 아버지에게 이끌려 대학을 중퇴하고 스위스로 유학을 떠난 그는 로잔의 한 캘빈교회 목사를 만나 다시 신교도가 됐고, 목사의 딸과 사랑에 빠졌다가 역시 아버지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한마디로 그는 교회 권력으로부터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지만, 가부장 권력의 바깥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기번은 당시 부유층 청년들이 견문을 넓히기 위한 필수 코스였던 유럽 여행(Grand Tour)을 떠나 1764년 이탈리아 로마에 도착했다. 자서전에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그 영원의 도시에 들어설 무렵 요동치던 격정을, 25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한다. 뜬눈으로 밤을 지샌 뒤 높다란 언덕에 올랐다. 폐허의 포룸, 로물루스가 글을 쓰고 키케로가 웅변하고 시저가 쓰러진 자리들을 찾아 다녔다.(…) 며칠이 지난 뒤에야 흥분이 잦아들면서 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1764년 10월 15일 저녁 무렵, 캄피돌리오(Capitoline) 언덕 유피테르 신전 언저리에서 맨발의 가톨릭 수도승들이 기도하는 장면을 우연히 보았고, 그 상징적 장면을 계기로 로마(제국이 아닌 도시)의 쇠망사를 쓸 결심을 했다고 자서전에 썼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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