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법률사무소에서 고객 회사 상표의 해외 출원과 등록 업무를 담당했던 30대 여성 근로자 A씨는 2013년 ‘회사에서 저지른 잘못이 가족들 앞에서 드러날까 전전긍긍해왔던 내 모습이 부끄럽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A씨는 자신의 업무상 실수로 피해를 입게 된 고객사가 일이 잘못 되면 법률사무소 측에 손해배상 책임을 묻겠다고 통지한 후부터 갑자기 흐느끼거나 업무 중 멍하게 앉아 있는 등 이상 행동을 보인 끝에 극단적 선택을 했다. 유족들은 A씨가 업무 스트레스로 우울증을 얻어 이런 결과가 초래됐다며 산업재해 신청을 했지만근로복지공단(이하 공단)은 “업무 관련성이 불확실하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유족들이 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냈고, 서울행정법원은 지난해 11월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공단은 항소했고 유족들은 A씨가 숨진 지 5년 가까이 지난 올 4월에서야 2심 승소 판결 끝에 업무상 재해를 최종 확인 받을 수 있었다.
현행법상 근로자가 직장 스트레스 등으로 정신질환을 앓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에는 자살이라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해 산재 보상을 해준다. 그러나 공단이 정신질환, 특히 그 중에서도 자살에는 유독 깐깐한 잣대를 들이대 유족들이 두 번 우는 일이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7일 공단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이용득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공단이 근로자의 정신질환(자살 포함)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지 않았다가 소송을 당해 패소(확정판결 기준)한 비율은 올 들어 6월까지 76.5%(17건 중 13건 패소)에 달했다. 공단과 유족 간 이견이 발생했을 때 10건 중 7건은 법원이 유족 손을 들어줬다는 뜻이다.2010년부터 올 6월까지 공단이 패소한 정신질환 사건 44건 중 대다수(75%)는 자살이었다.
올해만큼은 아니지만 2016년(33.3%), 2017년(29.4%)에도 정신질환 관련 패소율은 타 질환보다 훨씬 높았다. 반면 올 들어 6월까지 뇌심혈관계 또는 근골격계 질환 관련 업무상 재해 인정 소송에서 공단 패소율은 각각 19.0%, 9.8%에 그쳤다.
자살 등 정신질환은 질환에 이른 이유가 근로자의 성향 때문인지 아니면 외부 요인 탓인지, 외부 요인이라면 직장 내 스트레스인지 직장 밖 원인인지 등을 명확히 가르기 어렵다는 특성이 있다. 그러다 보니 공단의 정신질환 판정에 과도한 주관적 판단이 개입돼 낮은 산재 인정률과 높은 패소율로 이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가령 공단은 ‘평균적인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업무 스트레스로 자살하지 않는다’는 논리로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지 않을 때가 많지만, 법원은 ‘평균보다 취약한 성격을 가진 근로자라 해도, 업무상 이유로 고통 받았다는 인과관계가 명확하다면 업무상 재해로 봐야 한다’는 판례를 유지하고 있다.
김세은 직업환경의학전문의는 “업무 관련성 판정을 위한 명확하고 세부적인 기준 마련이 필요하며, 산재보험의 사회보험적 성격을 감안해 업무상 재해 인정의 문턱이 너무 높지 않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용득 의원은 “재해자의 명예 회복을 위해서라도 공정하고 신속한 판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고,주평식 고용노동부 산재보상정책과장은“지적을 수용해 제도 개선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성택 기자 highno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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