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0년 우리 지성사에서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 시대는 1960~70년대였다. 20세기 전반기에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민족주의 사상이 지식사회를 주도했다면, 1960년대부터는 다양한 담론과 사상들이 지식사회 안에서 경쟁했다.
이러한 변화에는 두 요인이 중요했다. 첫째, 산업화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자본주의와 산업사회 이론들이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둘째, 광복 이후 미국 등 서구 유학생들이 증가하면서 이들이 서구에서 배운 이론들을 우리 현실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정치학의 민주주의, 경제학의 케인스주의, 사회학의 페미니즘은 그 대표적인 담론들이었다.
1960~70년대 이후 등장한 담론들 가운데 이채로운 것이 ‘민중 담론’이다. 민중 담론은 서구 이론이라기보다 우리 이론이었다. 민중이라 하면 먼저 민(民), 민초(民草), 백성(百姓)을 떠올릴 수 있다.
이러한 민중 담론에서 한국 현실과 서구 이론을 결합시켜 민중이란 개념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이가 사회학자 한완상이다. 그가 펼친 민중사회학은 민중신학, 민중문학론과 함께 1970년대 이후 민중 담론을 주도했다. 이 민중 담론은 사회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고, 1987년 민주화 시대를 여는 데 결코 작지 않게 기여했다.
◇민중과 지식인의 사회학
한완상은 1936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났다. 서울대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미국 에모리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70년부터 서울대에서 사회학을 가르쳤다. 한완상이란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전반 작가 최인호, 문학평론가 김병익 등이 참여한 ‘청년문화’ 논쟁을 통해서였다.
이 논쟁에서 한완상이 취한 입장은 비판적 접근이었다. 그에 따르면, 청년문화는 본래 대항문화(counter-culture)의 창조적 의식을 보여주는 문화다.
한완상은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청년문화의 존재 가능성을 회의했다. 분단의 특수한 정치 상황, 젊은 세대를 존중하지 않는 유교문화, 타율성을 내면화하는 교육제도 등의 영향으로 행동적 대항문화로서의 청년문화는 성립하기 어렵다는 게 그의 진단이었다. 팝송ㆍ청바지ㆍ통기타 등의 청년문화는 표피적 청년문화이지, 기성문화에 맞서 이를 극복하는 창조적 대항 정신의 청년문화는 아니라는 게 그의 결론이었다.
이러한 한완상의 문제의식은 자연스레 사회적 주체와 구성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유신독재가 절정에 달했던 1970년대 후반 그는 그 탐구의 결과로 ‘지식인과 허위의식’(1977), ‘민중과 지식인’(1978)을 내놓았다.
‘민중과 지식인’은 ‘민중사회학’과 함께 한완상의 사회학을 대표하는 저작이다. 민중이란 누구인가. 그는 민중을 “정치적 통치수단과 경제적 생산수단과 사회문화적 군림(君臨)수단으로부터 소외되어서 부당하게 억압받고 빼앗기고 냉대 받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한다. 이렇듯 민중은 계급보다 포괄적인 개념이다.
한완상은 민중을 ‘즉자적 민중’과 ‘대자적 민중’으로 나눈다. 즉자적 민중이 객관적으로 자기 모습을 볼 수 없는 이들이라면, 대자적 민중은 자기 잠재력과 저력을 객관화해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이들이다. 의식화되지 못한 민중이 즉자적 민중이라면,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깨달은 민중이 대자적 민중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대자적 민중의 한 집단으로 한완상은 지식인을 주목한다. 먼저 그는 ‘지식기사’와 ‘지식인’을 구분한다. 지식기사가 현상 관찰과 분석에 주력하는, 가치중립성을 중시하는, 현실 세계를 외면하는 이들이라면, 지식인은 관찰과 분석을 넘어 아픔에 공감하고 진실을 증언하는, 가치중립성을 넘어 지배집단의 허위의식을 통찰하고 폭로하는 이들이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지식인은 즉자적 민중을 대자적 민중으로 승화시키는 사명을 부여 받는다고 그는 강조한다.
민중과 지식인에 대한 한완상의 이론은 카를 마르크스와 사회학자 C. 라이트 밀스의 이론으로부터 영향받은 것으로 보인다. 장 폴 사르트르의 지식인론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이러한 민중과 지식인론으로 한완상은, 밀스와 사르트르가 자기 사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1970년대 이후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공공 지식인’으로 부상했다. 민중과 지식인론의 연장선에서 그는 ‘민중시대의 문제의식’(1983), ‘민중사회학’(1984) 등을 발표했다.
◇‘사회 의사’로서의 지식인
한완상과 함께 민중 담론에 크게 기여한 이들은 민중신학자 서남동, 문학평론가 백낙청, 그리고 경제학자 박현채였다. 서남동은 하나님의 뜻인 인간해방이 우리 사회에선 ‘민중해방’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했고, 백낙청은 역사의 주체인 민중의 삶을 반영한 ‘민중적 민족문학’을 내세웠다.
박현채는 민중을 노동자 계급에 더한 농민, 소상공업자, 도시빈민, 그리고 일부 지식인으로 파악했다. 이러한 박현채의 민중론은 한완상의 민중사회학과 함께 1980년대 학생운동을 위시한 사회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리 사회를 산업화 시대에서 민주화 시대로 전환시킨 1987년 6월항쟁의 주체도 다름 아닌 민중이었다.
민중 담론은 민주화 시대가 열리면서 새로운 상황을 맞이했다. 시민운동의 부상과 함께 ‘시민 담론’이 경쟁자로 등장했다. 민중 담론과 비교해 시민 담론은 상대적으로 온건했다. 민중이 사회 변혁의 주체라면 시민은 사회 개혁의 주체라는 게 그 핵심 아이디어였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첫 10년은 시민 담론의 르네상스였다. ‘국가 대 시민사회’가 정치사회의 기본 구도로 자리 잡으면서 경실련ㆍ참여연대ㆍ여성단체연합ㆍ환경운동연합 등 진보적 시민단체들은 물론 ‘뉴라이트’를 표방한 보수적 시민단체들의 정치적ㆍ사회적 영향력이 작지 않았다. 가히 ‘시민의 시대’라 부를 만한 시기였다.
2008년 촛불집회를 계기로 새로운 주체 담론이 등장했다. ‘다중 담론’이었다. 사회사상가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주조한 다중이란 자본의 지배 아래 노동하고 생산하는 모든 사람들을 지칭한다. 다중은 공장 안의 노동자뿐만 아니라 공장 밖의 노동자를 포괄한다. 이 다중 담론에는 탈근대적 지구자본주의의 변동이 반영돼 있다.
한완상의 민중사회학에 대해선 그동안 비판이 없지 않았다. 엄밀하지 못하고 과잉 규범적이라는 게 그 요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완상의 민중사회학은 우리 지성사에 두 가지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지식인의 사회 계몽적 역할에 대한 그의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둘째, 민중에 대한 그의 이론은 역사발전의 주체에 관한 선구적 담론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가 반복해 강조하듯, 민중은 역사의 주인이다.
한완상은 광복 이후 사회학자들 가운데 가장 먼 길을 걸어온 지식인이다. 대학 교수, 정부 장관, 대한적십자사 총재, 그리고 무엇보다 ‘공공 지식인’으로 살아 왔다.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다 대학을 떠나야 했고 정부에 참여해 정책 입안가로서 활동했던 그는 스스로에게 약속한 사회를 고치고 개혁하는 ‘사회 의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민중ㆍ시민ㆍ국민담론의 미래
21세기가 2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현재, 지구적 차원에서 가장 많이 호명되는 주체는 ‘국민’이다. 세계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돼 왔음에도 불구하고 국민국가를 구성하는 국민이란 말이 새롭게 주목 받는 것은 대단히 역설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국민 담론’의 등장에는 두 가지 배경을 주목할 수 있다. 첫째, 세계화의 진전이 낳은 결과다. 경제적 세계화가 심화될수록 이 경향에 맞서 정치ㆍ문화적 차원에선 민족주의가 부상한다. 이때 민족주의의 주체로서 국민이 호명된다. 둘째, 포퓰리즘의 발흥이 가져온 결과다. 포퓰리즘은 ‘엘리트 대 국민’이라는 이분법으로 지지 세력을 결집시킨다. 포퓰리스트들에게 엘리트란 기득권의 다른 호칭이다. 포퓰리스트 정치가들은 정치의 목표가 엘리트 기득권에 맞서서 인민주권을 회복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고, 이때 인민주권의 주체로서 국민을 호명한다.
우리 사회에서 민중 담론은 시민 담론을 거쳐 이제 국민 담론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국민 담론 안에는 민족주의적 국민과 지구주의적 세계시민 간의 정치적ㆍ문화적 긴장이 담겨 있다. 민족주의적 국민과 지구주의적 세계시민을 어떻게 공존시키고 화해시키며, 나아가 결합시킬 것인가는 앞으로 전개될 21세기에 부여된 가장 중요한 사회적 과제들 중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는 지난 한 세기 우리나라 대표 지성과 사상을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연재입니다. 다음주에는 안창호의 ‘도산 안창호 논설집’이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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