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를 통해 수 년간 보수단체를 특정해 지원한 배경에는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있었다. 2013년 12월부터 김 전 실장 지시에 따라 청와대 비서관 등이 구체적인 지원단체명과 지원금액을 일방적으로 전경련에 요구하는 식이었다. 법원은 5일 일명 화이트리스트(특정 보수단체 지원) 사건에 연루된 박근혜 정부 청와대 관계자들의 강요 혐의를 모두 유죄로 인정했다. 정점에 있던 김 전 실장은 법정 구속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8부(부장 최병철)는 이날 선고 공판에서 “헌법은 기업과 개인의 경제활동의 자유, 재산의 보호를 중요시하는데 이런 헌법가치를 중시해야 할 대통령 비서실 구성원이 전경련에 자금 지원을 강요한 것은 사적 자치 원칙을 침해한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김 전 실장을 사건의 최초 기획자, 전 정무수석들(박준우ㆍ조윤선ㆍ현기환)을 실행자로 판단했다. 이런 방식으로 2014~2016년 청와대가 전경련을 압박해 33개 친정부 성향 보수단체에 69억원 가량을 지원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김 전 실장과 조 전 수석 등 모든 피고인의 강요죄는 유죄로 인정했다. ▦전경련이 특정 시민단체를 지원할 어떤 의무도 없다는 점 ▦지원 대상이 되려면 지원 목적이 합당해야 하지만 청와대 요구 때문에 자율적 심사가 어려웠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다만 직권남용죄에 대해선 “특정 시민단체에 대한 자금 지원을 전경련에 요청한 것은 대통령 비서실장과 정무수석실의 일반적 직무권한에 속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김 전 실장에게 징역 1년6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블랙리스트(문화계 지원 배제) 사건으로 2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 받았지만 상고심을 받으면서 구속기간이 만료돼 지난 8월 6일 석방됐던 김 전 실장은 이날 다시 법정 구속되는 신세가 됐다. 허현준 전 청와대 행정관 역시 강요죄 외에 위증 혐의가 추가돼 징역 1년6월을 선고 받아 김 전 실장과 함께 법정 구속 됐고, 공직선거법 위반 및 국고손실 혐의가 추가된 현 전 수석은 징역 3년을 선고 받았다. 현 전 수석은 앞서 엘시티(LCT) 비리 등에 연루돼 부정한 금품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2심에서 징역 3년6개월을 선고 받고 구속 수감 중이다.
반면 검찰이 징역 6년을 구형한 조 전 수석은 이날 집행유예로 자유의 몸을 유지했다. “자금 지원 압박이 진행되던 과정에 정무수석에 임명됐고, 피고인이 직접 피해자 측을 압박한 정황을 찾을 수 없다”, 즉 가담 정도가 크지 않다는 게 재판부 판단이다. 2014년 9월부터 2015년 5월까지 이병기 전 국가정보원장 등으로부터 4,500만원을 받은 혐의에 대해 법원은 “직무 관련성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무죄를 선고했다.
박 전 수석과 신동철ㆍ정관주ㆍ오도성 전 비서관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현 전 수석과 함께 불법 여론조사 혐의 등을 받은 김재원 전 정무수석(현 자유한국당 의원)은 무죄가 선고됐다.
김현빈 기자 hb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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