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안만 생각하면 난 이성을 잃는 탓에 제대로 쓸 수 있을지 걱정도 되지만, 머리 속 가시를 글로 빼낼 때도 된 것 같다. 이 글은 개인 의견이며,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밝힌다. 과거 정정보도를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테니 말이다.
이해할 수 없는 판결들이 줄을 잇는다 싶었지만 사법농단의 실체에는 기자들이 접근하지 못했던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나는 소송 하나에 골몰해 있었다. 요약하자면, 2013년 10월 4일 한국일보 법조팀은 당시 모 장관이 부장검사 시절 삼성 사내 변호사였던 김용철 변호사에게 1,500만원 상당의 상품권을 받은 의혹을 보도했고, 해당 장관이 소송을 내자 법원은 1ㆍ2심에서 “김 변호사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며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기에 바로잡습니다”라는 정정보도문을 내라고 판결했다.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취하하고 합의해, 2016년 3월 그런 취지의 정정보도문을 실었다.
후배가 취재하고 기사를 작성했지만, 내가 팀장으로 발제를 독려 했기 때문에 난 그 난장판에 지분이 있었으며, 소송 대응도 도맡았다. 소송 기간 내내 법원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김 변호사는 우리가 단서를 가지고 취재에 나서자 ‘있었던 일을 없었다고 거짓말 할 수는 없다’고 마지못해 응했고(이 점은 오히려 그 진술의 신빙성을 높여줬다), 법원에 증인으로 출석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진술을 자세히 녹취해 법원에 제출했다. 그는 그 진술을 바꾼 적이 없는데, 법원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고 정정하라는 것일까. 한겨레신문, KBS 등도 취재해서 뒤따라 보도할 정도였는데, 왜 최초 한국일보 기사에 대해 사실로 믿을 상당한 이유가 없다는 걸까. 김 변호사가 상황을 자세히 말한 타사 인터뷰 기사, 상품권 수수 현장에 같이 있었다는 당시 검찰 간부가 대답을 회피하는 상황에 대한 한 매체의 보도를 갈무리해서 증거로 제출했는데, 왜 이런 증거들은 외면 받고 판결문에 제대로 언급조차 안 되는 걸까.
판사는 “김 변호사 진술이 액수, 대가성에서 기사와 다르다”는 이유를 들어 상품권(의류시착권)을 줬다는 그의 진술 전체를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김 변호사는 액수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고, 당시 인사철에 상품권을 줬다는 것인데 기사에는 삼성 관련 사건 무혐의 처분 후 줬다고 돼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사철도 같은 해 무혐의 처분한 이후였다.
나는 판사의 논리전개에 어안이 벙벙했다.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정도라면 내 지능으로 이해가 됐을 텐데, 사실이 아니라고 확인된 게 하나도 없는데 그렇게 쓰라니. 판사가 오보를 강요하는 게 아닌가. 1심에서 진 후에 대법관 출신 한 변호사가 그 판결에 대해 나만큼이나 화를 내며 “꼭 최선을 다해서 이기시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사명감에 불타서 “언론 판례가 후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답했던 것 같다. 우리팀은 조금만 유리한 말을 해줄 것 같은 증인들을 찾아 다니며 녹취하거나 진술서를 작성해 제출하고, 정말이지 최선을 다했다.
최선을 다하면 후회가 없다는데, 오히려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그것을 내팽개친 법원이 무서웠다. 엄밀히 말해 짧지 않은 기간 법조기자 생활을 했던 내가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게 될까 봐 무서웠고, 사실 그렇게 됐다. 납득 못할 판결이 나와도 “내가 모르는 사정을 판사는 알고 있을 수 있으니 비판하기 전에 더 알아보자”는 생각이 우선이었으나, 소송을 겪은 후에는 “이 판사는 또 어떤 장난을 친 걸까, 어떤 증거를 배제하고 못 본 척한 걸까”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래서 슬프다. 제발 부탁이니, 아무리 공부를 잘했어도 원칙을 지킬 용기가 없다면 판사 자리에 지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권력에 굽히며 사회를 망치자고 있는 자리가 아니지 않나.
이진희 기획취재부 차장 ri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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