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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성추문 보혁대결로 비화

입력
2018.10.08 16:01
수정
2018.10.08 21:0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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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이 9월5일 바티칸 성베드로광장에서 연설하던 도중 바람에 날린 망토에 얼굴을 가리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이 9월5일 바티칸 성베드로광장에서 연설하던 도중 바람에 날린 망토에 얼굴을 가리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13억명에 육박하는 전세계 가톨릭 신자의 정신 세계를 관할하는 바티칸에서 세속 정부에서나 볼 수 있는 보혁 대립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진보 성향의 프란치스코 교황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보수파 주교들이 ‘교황이 교회 내부의 성폭력 문제를 외면했다’고 비판하자, 침묵을 지키던 교황 측근들이 7일(현지시간) 반격을 가하고 나섰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외신에 따르면 교황청 관료 조직 쿠리아의 고위 사제 마르크 켈레 추기경은 이날 카를로 마리아 비가노 대주교에게 3쪽짜리 공개 경고 서한을 보냈다. 주미 교황청 대사를 지낸 비가노 대주교는 2013년 6월 교황에게 시어도어 매캐릭 전 미국 추기경의 성 학대 의혹을 보고했으나, 교황이 이를 묵살했다고 지난 8월 주장한 바 있다. 켈레 추기경은 비가노 추기경의 주장에 대해 “근거 없는 정치적 조작극”, “중상모략”이라고 규정했다. WSJ는 켈레 추기경의 조치와 관련, 보수파의 공격에 침묵을 지키던 교황 측근들이 반격에 나선 것으로 분석했다. 이 신문은 그러나 “켈레 추기경의 반박 과정에서 교황청이 매케릭 전 추기경의 일탈 행위를 알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났다”며 오히려 보수ㆍ진보의 대립이 격화할 가능성을 예고했다.

◇‘개혁가’ 혹은 ‘독재자’ 두 얼굴의 교황

2013년 취임 이래 프란치스코 교황과 ‘정통주의자’로 불리는 바티칸 보수파의 대결은 계속되어 왔다. 교황은 2015년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시노드)에서 이혼ㆍ재혼ㆍ동거 부부들이 영성체에 조건부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2016년 4월에는 결혼과 성에 관한 사도적 권고 ‘사랑의 기쁨’을 발표, 이혼과 재혼자에 성소수자까지 “교리 원칙상 인정할 수는 없다”라면서도 “더욱 포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정통주의자들은 우려를 표명했고 교황은 이들을 내치는 것으로 응답했다. 보수파 저항 운동의 대표 주자로 꼽히는 레이먼드 버크 추기경은 일찍이 2014년 가톨릭 교회 최고법원 수장 역할인 교황청 대심원장 자리에서 쫓겨났다. 2017년 1월에는 매슈 페스팅 몰타 기사단장이 교황의 요구로 사임했다. 6월에는 신앙교리성 장관을 맡던 게르하르트 뮐러 추기경이 임기 만료로 사퇴하고, 교황과 같은 예수회 출신인 루이스 라다리아 페레르 대주교가 그 자리를 메웠다.

위기감을 느낀 보수파는 ‘로마의 일개 주교’를 자처하며 탈권위를 추구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정작 그 개혁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는 권위주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고 공격했다. 몰타 기사단원으로 페스팅 단장의 명령을 받아 사서를 집필하던 헨리 사이어는 2017년 가명을 쓰고 ‘독재자 교황’이라는 책을 발간해 큰 파문을 일으켰다.

2017년 2월4일 이탈리아 로마 시내에 프란치스코 교황을 비방하는 벽보가 붙어있다. 로마=EPA 연합뉴스
2017년 2월4일 이탈리아 로마 시내에 프란치스코 교황을 비방하는 벽보가 붙어있다. 로마=EPA 연합뉴스

◇성적 스캔들 이용하는 보수파

힘이 빠져가던 보수파가 세를 규합하게 된 것은 교황 측근 성직자들의 아동 성범죄 의혹이다. 2017년 아동 성범죄 혐의로 기소된 조지 펠 추기경은 이념적으로는 보수 성향으로 분류되지만, 교황의 전폭적 신뢰 하에 교황청 재무원장직을 맡아 재정 운영 개혁 작업에 앞장서던 인물이었다. 미국의 매캐릭 추기경도 2014년 교황의 성지순례에 동참한 측근이다.

보수파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직자의 아동 성범죄에 관대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공격하고 있다. 여기엔 이념적인 근거도 있다. 교황이 성소수자에 대한 포용의 메시지를 보냄으로써 아동 성범죄를 용인한다는 것이다. 비가노 추기경은 “동성애에 관한 기독교 교리를 바꾸려는 흐름”을 비판하며 교황뿐 아니라 교황의 지지자인 진보 성향 성직자 32명을 지목해 사직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발맞추듯 이달 1일 등장한 보수 단체 ‘더 나은 교회 통치 그룹’은 ‘붉은 모자 보고서’를 작성해 다음 콘클라베(교황 선거) 전까지 진보 성직자를 겨냥, 성범죄 전력을 조사하겠다고 나섰다. 정치적 의도를 노골화한 것이다.

8월26일 아일랜드에서 열린 세계가정대회 도중 가톨릭 성직자의 아동 성학대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집회를 열고 있다. 더블린=EPA 연합뉴스
8월26일 아일랜드에서 열린 세계가정대회 도중 가톨릭 성직자의 아동 성학대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집회를 열고 있다. 더블린=EPA 연합뉴스

◇“투명하고 독립된 조사 기구 필요”

역설적이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회 개혁을 추진하는 이유도 근원을 따지면 성직자의 아동 성범죄 때문이다. 교황은 2013년 예수회 잡지와 인터뷰에서 교황청을 “콜레스테롤 수치에 집착하는 야전 병원”에 비유했다. 성직자의 성학대 논란에 휘말린 교회가 교도 개인의 성윤리를 엄격하게 따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의미다. 또 교황이 개혁을 추진한 교황청의 지나친 중앙 집권적 관료제는 가톨릭 성직자의 성폭력 은폐 공모가 이뤄지는 근본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당장 논란의 중심이 된 매캐릭도 일찍이 2000년부터 성범죄 행태가 바티칸에 보고됐지만 무려 18년간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하지만 성폭력 피해자들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동이 여전히 불충분하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교황이 성범죄 피해자를 초빙해 설립한 아동보호위원회는 권한이 없는 채로 표류하고 있다. 영국의 성폭력 생존자 피터 손더스는 “교황이 가난과 환경 문제 등에 대해서는 많은 활동을 하지만 성폭력 문제에 대해서는 가끔 고통을 느낀다는 말만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가톨릭 언론은 교황이 잃어버린 교회 개혁의 명분을 찾기 위해서라도 성범죄 관련 의혹을 해명하고, 교회 내 정치적 논쟁에서 자유로운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영국 가톨릭 언론 ‘태블릿’의 브렌던 월시 편집자는 “최근 과거 성폭력 폭로에 대한 교훈을 얻자면, 교회에는 결국 투명하고 독립된 조사 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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