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이 따갑던 평일 오후. 남루한 옷차림의 한 남자가 쏟아지는 햇볕을 고스란히 받으며 서울역 광장 한 켠에 쓰러져 자고 있다. 술을 많이 마신 듯,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도 술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저렇게 그냥 두어도 될까’ 걱정이 들 정도로 남자의 얼굴은 술과 햇볕으로 빨갛게 익어 있었다.
“어이 영수(가명)야, 여기서 자면 안돼. 큰일나 이 사람아. 어서 일어나.” 쓰러진 남자를 잘 아는 듯 다가가 흔들어 깨우는 사람은 서울 남대문경찰서의 서울역 파출소 소속 한진국(57) 경위다. 그는 올해로 4년째 서울역에서 노숙인 관리를 하는 지역 전문관 일을 하고 있다. 지역 전문관은 서울역과 영등포역 등 노숙인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주로 배치된다.
주 업무가 노숙인들 관리여서 그의 하루 일과는 노숙인들과 함께 시작해 노숙인들과 함께 끝난다. 매일 오전 7시에 서울역 광장을 한 바퀴 돌며 첫 번째 순찰을 시작한다. 오늘은 누가 나왔고 어디에 있는지, 혹시 아프거나 다친 사람은 없는지 살펴본다. 그렇게 오후 9시 퇴근 시간까지 한 번에 한 시간 반 가량 걸리는 순찰을 수 차례 돈다.
오전 11시, 한 경위의 순찰을 기자가 따라가 봤다. 서울역 8번 출구 앞, 무리 지어 둥그렇게 모여 앉아 있던 노숙인들 중 한 사람이 지나가던 한 경위를 보자 먼저 인사를 건넸다. “형님, 나오셨어요. 그냥 가지 말고 술값 좀 주고 가요.” “석이(가명)야, 술 좀 끊어. 이제 술 그만 마시고 좋은 생각만 하며 살아라.”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서로 주고받는 인사가 친근하다.
몇 걸음 떼지 않아 또 다른 노숙인들 여러 명이 앉아서 술 추렴을 하고 있다. “하, 이 사람들, 아침부터 이게 뭐야. 이러면 건강 해치네.” 한 노숙인이 술 값 좀 달라며 한 경위를 부른다. “그만들 하라”는 한 경위의 말에 노숙인들이 주섬주섬 벌여놓은 술잔과 술병을 집어 든다.
서울의 많은 지하철역 가운데 유독 서울역과 영등포역에 지역 전문관이 배치된 것은 까닭이 있다. “1997년에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터졌을 때 갈 곳 잃은 실직자들이 서울역 주변 염천교 다리 밑과 영등포역 등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점점 많아지자 그들을 관리할 경찰관이 필요해 2000년부터 서울역과 영등포역에 지역 전문관이 배치됐죠.”
지역 전문관은 일반 경찰관과 다른 눈높이에서 노숙인들을 바라본다. “요즘은 세상살이가 각박해져서 모든 사건들이 법적 절차에 따라 이뤄집니다. 하지만 정상 생활이 불가능한 노숙인들에게 경직된 법의 잣대만 들이밀면 안되죠. 그래서 지역 전문관은 노숙인과 눈높이를 맞춰 이들의 삶과 고민을 인간적으로 들여다보기 위해 노력합니다. 노숙인들 스스로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도록 돕는 역할이죠.”
그만큼 지역 전문관 일을 하는 한 경위는 노숙인들을 적극 이해하려고 신경을 많이 쓴다. 실제로 한 경위의 순찰을 동행해 보니 때로는 아버지나 형처럼 노숙자들을 챙겼다. 인도에 누워있는 노숙인을 부축해 일으키기도 하고 몸을 잘 가누지 못하는 노숙인에게는 휠체어를 불러주겠다고 제안했다. 서울역에 꾸준히 나오는 노숙인들은 쉽게 한 경위를 알아 봤다. 한 경위도 익숙한 듯 술값이나 담배를 주고 가라는 노숙인들의 인사 아닌 인사를 웃음으로 받았다.
지역 전문관 일을 하며 가장 힘든 것든 것은 조현병 증세를 보이는 노숙인들을 상대하는 일이다. 2,3개월 전 서울역에서 한 노숙인이 옆에 있던 노숙인의 얼굴에 칼을 휘두른 사건이 발생했다. 30대 남성인 그는 술을 마신 뒤 조현병 증상이 발현돼 기억을 하지 못하는 사이에 다른 노숙인 얼굴에 칼부림을 했다. 한 경위에 따르면 이 남성은 평소에 정신질환 약을 복용했으며, 조현병 증세를 보인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폭행했다가 교도소에 다녀온 전력이 있다. 사건 직후 그는 구속됐다.
이런 사태를 막으려면 평소에 조현병 증세를 보이는 노숙인들을 유심히 관찰해야 한다. 환청을 듣거나 환상을 보지 않는지, 음식물 쓰레기통을 뒤져 음식을 먹는 이상행동을 하지 않는지 주의 깊게 살펴 본다. 더러 이런 증세를 보이는 노숙인이 있으면 즉각 응급 입원조치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 과정이 쉽지 않다. “술을 많이 마시는 노숙인들은 정신질환, 특히 조현병 증세를 보이는 경우가 많아요. 이 경우 응급입원이 필요한데, 그러려면 현장성을 입증해야 합니다. 하지만 조현병 환자들이 평소에 멀쩡해 보여서 현장성을 입증하기 힘들어요.” 그래도 꾸준한 노력 덕분에 조현병 증세를 보이는 노숙인들이 일으키는 사건사고가 많이 줄었다.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는 노숙인들은 따로 요양시설이나 보호소로 이송된다. 더러는 종교시설 등에 머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보호시설에 머무는 노속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되돌아 온다. 마치 연어가 회귀하듯 이들은 다시 서울역으로 모여 든다. “노숙인들이 서울역으로 모이는 가장 큰 이유는 외로움 때문입니다. 종교시설에 머물던 노숙인들은 술도 마실 수 없고 각종 제약이 따르니 이를 견디지 못하죠. 일부는 쪽방촌 등 잠 잘 곳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서울역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제 한 몸 가누기 힘들 정도로 공간이 비좁아 답답하게 여기기 때문이죠. 그렇게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친구를 찾아 광장으로 다시 나옵니다.”
한 경위 기억에 그렇게 서울역 주변에 모여 드는 노숙인들이 200명 이상이다. 다시 모인 노숙인들은 서울역 주변을 배회하다가 얻은 돈으로 술을 나눠 마시기도 하고 역사 한 켠에서 새우잠을 자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건강이 좋지 않은 노숙인들은 더욱 건강을 해칠 수 있다.
“2,3년 전 겨울, 서울역 광장에 노숙하던 허리가 매우 아픈 할머니를 지금도 기억합니다. 온갖 물건을 손수레에 잔뜩 싣고 거리를 방황하다가 서울역 지하 구간에서 새우잠을 잤죠. 조사해보니 연고자도 없었어요.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식사도 혼자 하지 못할 정도여서 걱정이 컸습니다. 방을 구해줄 테니 같이 가자고 해도 사람을 믿지 못해 따라오지 않더군요. 할머니를 설득해 요양병원으로 옮기는데 6개월 걸렸습니다. 그 할머니는 요양병원에서 편안히 생활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노숙인들이 도움의 손길에 선뜻 응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세상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살아오면서 겪은 일들과 개인의 고집이 섞이면서 세상에 대한 불신을 굳힌 노숙인들이 많습니다. 나이 든 노숙인들일수록 이런 경향이 강합니다. 기초수급비 지급과 방을 제공해 준다고 해도 믿지 않아요.”
하지만 한 경위는 그런 노숙인들도 포기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설득해 지원을 받도록 해주면 너무 고마워하죠. 나라에서 이런 지원을 해주는 줄 몰랐다며 진작에 받지 못한 것을 많이들 후회합니다.”
한 경위가 4년간 지역 전문관으로 일하면서 절실하게 필요성을 느낀 것은 노숙인들이 스스로 찾아갈 수 있는 자활센터다. “노숙인들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면서 이들이 다시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울 수 있도록 촘촘하고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마련한 보호소가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노숙인들이 진심으로 원해서 할 수 있는 일을 마련해 주는 것이 중요하죠.”
권용일 인턴기자
정다혜 인턴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