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정책 만들며 한국모델 차용
베트남의 독립과 개혁ㆍ개방을 이끈 도 므어이 전 공산당 서기장이 101세를 일기로 1일 별세했다.
베트남뉴스통신(VNA) 등 현지 언론은 고위공직자 보건위원회의 발표를 인용, 므어이 전 서기장이 1일 오후 11시 12분(현지시간) 하노이 군중앙병원에서 별세했다고 2일 보도했다.
베트남 해방투쟁의 산증인으로 불렸던 므어이 전 서기장은 1917년 하노이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페인트공으로 일하다가 1936년 베트남 공산당의 전신인 인민전선운동에 뛰어들었다. 본명은 ‘응우옌 주이 꽁’이지만, 프랑스 식민지 시절인 1941년 프랑스군에 체포돼 10년형을 선고 받는 등 혁명 전사로 이름을 날려 ‘열번 탈출했다’ 또는 ‘열번 승리했다’는 뜻을 지난 ‘도 므어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베트남의 국부인 호찌민 전 주석이 프랑스 식민지 시절 주로 해외에서 활동한 것과 달리 자국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한 국내파 혁명 1세대로 꼽힌다.
또 므어이 전 서기장은 베트남 경제건설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 평가된다. 1986년 공식 채택한 도이머이 정책을 적극 추진하면서 실리위주의 정책을 도입, 베트남을 개혁ㆍ개방의 길로 이끌었다. 특히 베트남 경제를 견인하고 있는 외국인투자 과련 법안 설치에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경제정책 수립 과정에서는 한국의 발전모델을 원용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상을 연구했던 것으로도 알려졌다. 베트남 독립 후 상무부 장관, 건설부 장관, 부총리, 총리를 거쳐 1991년 6월부터 1997년 12월까지 권력서열 1위인 공산당 서기장을 지냈다.
이 외에도 중국은 물론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최대 걸림돌이었던 캄보디아 주둔 베트남군의 철수가 그의 주도로 결정됐다. 미국,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가 모두 그의 서기장 재임 기간에 이뤄졌다. 1992년 한국-베트남 수교에도 역할을 한 므어이 전 서기장은 1995년 한국을 공식방문하고 1996년 베트남을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는 등 우리나라와도 각별한 인연이 있다. 2012년 아주대병원 신경외과 교수진이 베트남의 요청으로 현지를 방문, 척추질환을 앓던 므어이 전 서기장을 치료하기도 했다.
호찌민=정민승 특파원 ms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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