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6일 핀란드 헬싱키공항에선 특별한 영화제가 열렸다. 일반 승객은 갈 기회가 거의 없는 항공기 격납고 내부에 대형 스크린이 펼쳐졌다. 영화제라고 하지만 출품작은 13분짜리 단 한 작품, ‘이스트 앤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East & West Side Story)’로 핀에어와 헬싱키공항이 공동 제작한 일종의 홍보 영화다. 끝없이 펼쳐지는 핀란드의 대자연과 헬싱키의 생기 넘치는 도심과 이름난 관광지가 스크린을 가득 채울 거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애석하게도 핀란드 여행의 단서가 될 만한 장면은 단 한 컷도 없었다. 영화는 한국인 사진작가가 세상에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는 유명 공상과학소설가의 인터뷰 사진을 찍으러 핀란드까지 갔다가 허탕치고 돌아온다는 단순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핀란드의 모습은 소설가가 휴식하는 호숫가의 아담한 오두막 한 채가 전부다. 하늘마저 우중충해 호수 물빛도 햇살이 반짝이는 대신 어스름한 잿빛이다. 이렇게 담백할 수가 있나? 핀란드를 대표하는 항공사의 홍보 영상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겸손하다. 화면 구성과 편집도 화려함과는 벽을 쌓았고, 자극적인 요소라곤 전혀 없다.
영화제는 핀에어와 헬싱키공항이 진행하는 ‘매치 메이드 인 헬(Match Made in HEL)’ 홍보 행사의 마지막 이벤트였다. 헬(Hel)은 당연히 헬싱키를 줄여 쓴 말인데, 식사 자리에서 “지옥(Hell)에서의 만남인가요?”라고 ‘아재 개그’를 날렸다가 분위기가 싸늘해졌다(갑.분.싸)! 그도 그럴 것이 인천공항을 출발해 헬싱키공항에 도착한 승객은 대부분 환승 통로에 길게 줄을 선다. 실제 핀란드에 입국하는 승객은 많지 않다. 비행시간 9시간30분(돌아올 때는 8시간30분), 러시아를 제외하면 한국에서 유럽으로 가는 가장 짧은 노선이라는 이점을 철저히 이용하는 셈이다.
무한 겸손 헬싱키, 이 도시에는 아우성이 없다
헬싱키의 풍경도 영화처럼 담담하다. 네모 반듯하게 각지고 성곽처럼 단단한 건물 외벽은 무표정에 가까운 핀란드인을 닮았다. 콘크리트의 딱딱함을 가린 컬러도 화사함과는 거리가 있다. 원색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빛 바랜 듯 엷은 페인트를 입었다. 노랑, 분홍, 빨강, 파랑의 다양한 색이 어우러져 있지만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대충 무채색에 가깝다.
관광지로 제법 이름난 곳도 ‘나 잘났다’고 요란하게 자랑하지 않는다. 시내 중심부의 캄피예배당(Kamppi Chapel)은 2012년 문을 열자마자 단숨에 헬싱키를 대표하는 건물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세계적인 대형 교회를 거느린 한국의 기준으로 보면 규모는 지나치게 소박하다. 이 도시에서 가장 붐빈다는 나린카 광장 한쪽 구석에서 가문비나무의 색과 질감을 살린, 도자기 모양의 유려한 곡선이 눈길을 끌 뿐이다. 외부에 그 흔한 십자가도 없어 사전 정보가 없다면 무슨 건물인지 알아채기조차 어렵다.


‘캄피예배당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캄피예배당은 헬싱키의 한복판에 위치한 곳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평화와 고요를 음미하기 위한 장소입니다.’ 예배당 안내소에 비치된 한국어 홍보물의 어투도 차분하기는 마찬가지다. 서울에 비하면 헬싱키 전체가 고요의 성지나 다름없는데, 여기서 또 ‘평화와 고요를 음미’하라니. 예배당 내부는 말 그대로 ‘절대 고요’다. 청각뿐 아니라 시각적으로도 그렇다. 근엄한 후광을 엎은 예수상도, 은은하게 빛을 뿌리는 스테인드글라스도 없다. 천장에서 스며드는 자연 채광이 오리나무로 둥그스름하게 마감한 벽을 부드럽게 감쌀 뿐이다. 바닥에는 물푸레나무로 만들었다는 긴 의자가 놓여 있고, 설교대에 놓아 둔 젓가락처럼 가녀린(일부러 찾아야 할 만큼 정말 작다) 십자가만 이곳이 종교 시설임을 증명한다. 사진 촬영이 금지돼 관광객도 발소리와 숨소리를 죽이고 몸가짐을 조심한다.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마음만 오롯이 남는다. 없던 신앙심도 절로 생길 듯하다.


약 1km 떨어진 템펠리아우키오 교회(Temppeliaukio Church)도 마찬가지다. 이 교회는 특이하게도 자연 암반을 아래로 둥글게 파고, 그 위에 돔을 얹은 형태로 지었다. 다른 말로 ‘암석교회’라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늘을 찌르는 첨탑과 전망대를 자랑하는 유럽의 다른 교회와 비교하면 모양부터 겸손하다. 외부에서는 암반 위에 체육관 지붕같이 생긴 돔만 보인다. 교회 내부는 더 특이하다. 둥그스름한 벽면엔 투박한 바위가 그대로 드러나 있고, 서까래가 방사형으로 떠받치고 있는 돔 가장자리로 자연 채광이 은은하게 비춘다. 소박한 연단 옆에 파이프오르간만이 돋보인다. 가끔씩 연주회도 열린다니 거대한 바위 동굴인 교회에 울려 퍼지는 음악이 어떨지 궁금하다.
헬싱키의 상징적인 관광지인만큼 온갖 자랑을 늘어놓은 안내판이라도 있을 법한데 찾을 수 없다. 교회 바깥, 잘 보이지 않는 바위 벽면에 원래 짓기로 한 건물의 외관을 새긴 작은 동판 하나를 붙여 놓은 것이 전부다. 설명도 단 한 문장 ‘바위 언덕에 지으려던 이 교회는 1939년 11월 30일, 겨울전쟁으로 건설이 중단되었다’는 사실만 담백하게 적었다. ‘겨울전쟁’은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해 발발한 전쟁이다. 1581년부터 스웨덴 왕국의 일부였고, 1809년부터는 제정 러시아의 영토였다가 1917년에야 독립한 핀란드의 힘겨운 역사가 밴 흔적이다. 당시 중단된 공사는 1968년 재개해 이듬해 현재의 ‘암석교회’ 모습으로 완공했다.



이 나라는 영웅을 기리는 방식도 지나치리만큼 차분하다. 헬싱키 서북쪽 바닷가의 시벨리우스공원에는 24톤, 600개의 크고 작은 금속 파이프로 구성한 시벨리우스 기념 조각이 세워져 있다. 작곡가 시벨리우스(Jean Sibeliusㆍ1865~1957)가 사망한 지 10년이 지난 1967년 조각가 에일라 힐투넨(Eila Hiltunen)이 헌정한 작품이다. ‘음악의 열정(Passio Musicae)’이라 이름한 이 작품은 공중에 붕 뜬 채 하늘로 울리는 듯한 파이프오르간을 형상화했다. 바위에 박힌 3개의 파이프 기둥이 작품을 떠받치고 있어, 바로 아래에서 구멍이 숭숭 뚫린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다. 시벨리우스가 누군가. 정규 교육을 받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핀란드의 국민 영웅이다. 그럼에도 조형물 옆에 그의 얼굴 조각을 세웠을 뿐 이렇다 할 설명이 없다. 웬만하면 시벨리우스의 음악적 업적과 이 특이한 조각에 대한 해설이 있을 법도 하지만, 모든 것이 사족이라 생각한 듯하다. 단순하고 소박함이 미덕인 헬싱키에선 그 이상의 모든 것이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공해일지 모른다.


튀지 않으면서도 묵직한 핀란드 디자인
헬싱키가 자랑하는 또 하나의 관광 콘셉트는 디자인이다. 캄피예배당과 암석교회, 시벨리우스 기념 조각도 튀지 않으면서 울림이 묵직한 핀란드 디자인의 전형이다. 헬싱키 디자인을 소개하는 안내책자에는 무려 200개가 넘는 공방과 작은 가게가 수록돼 있다. 그러나 헬싱키의 ‘디자인구역(Design District)’은 서울의 청담동처럼 고급 패션브랜드가 즐비한 것도 아니고, 동대문처럼 작은 옷 가게나 액세서리 가게가 한 건물에 빼곡하게 모여 있는 것도 아니다. 금속공예, 생활용품, 도자기, 개성 넘치고 실험적인 패션 숍이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다. 말하자면 헬싱키 전체가 디자인 구역인 셈이다. 세라믹 생활용품을 제작ㆍ판매하는 한 매장의 주인장은 핀란드 디자인에 대해 ‘천연 소재를 이용해 심플하고 실용적인 것이 강점’이라고 자랑했다. 색상과 모양이 일견 밋밋한 것 같으면서도 세련됨이 묻어난다.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헬싱키 디자인박물관’은 핀란드 디자인의 역사와 저력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전쟁 후 모든 물자가 부족했던 1950년대부터 핀란드는 ‘일상에 아름다움을 입힌다’는 전략으로 디자인 산업을 키웠다. 예술과 수공예의 결합은 생활용품에서부터 패션, 건축, 사진예술 등 산업 전분야로 확산됐다. 지금은 전설이 돼버린 노키아나 앵그리버드, 클래시오브클랜 등 전자제품과 게임산업의 토대도 결국 핀란드 디자인이 탄탄한 바탕이었다.
무 자극의 도시, 특별할 것 없는 평온한 일상
천국과 지옥은 상대적이다. 저녁 식사가 끝난 헬싱키의 밤거리에는 인적이 드물다. 실내등을 환하게 밝히고 무심하게 도심을 오가는 녹색 전차에도 승객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이 도시의 양대 교회라 할 루터교의 헬싱키대성당과 정교회의 우스펜스키대성당에도 은은한 경관조명이 켜져 있을 뿐, 관광객의 발길이 뜸하다. 헬싱키의 야간 산책은 그래서 심심하지만 북국의 상념에 제대로 빠져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여느 대도시의 뒷골목처럼 위험하지 않다는 것도 자랑할 만하다.



한국인에게도 제법 알려진 일본 영화 ‘카모메식당’(2006년ㆍ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은 헬싱키를 떠올리게 하는 또 하나의 매개다. 헬싱키의 한적한(사실 이 도시는 어딜 가나 한적하다) 골목에서 주먹밥을 주 메뉴로 하는 일본식당을 배경으로 그린 영화다. 식당은 지금도 영화 제목을 그대로 간판으로 달고 영업 중이다. 파리만 날리는 식당에서 주인공 사치에는 왜 헬싱키에서 식당을 하는지 묻는 미도리의 질문에 ‘하기 싫은 일을 안 할 뿐이에요’라고 담담하게 대답한다. 그렇다. 이곳에선 ‘죽기 전에’라는 살벌한 의무감으로 꼭 봐야 할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니요, 꼭 먹어야 할 음식이 있는 것도 아니며, 꼭 즐겨야 할 무언가는 더더욱 존재하지 않는다. ‘카모메식당’이 보는 것만으로 힐링이 되는 영화라면, 헬싱키는 그저 머무르는 것만으로 휴식이 되는 도시다. 어딜 가나 눈과 귀가 즐거워야 직성이 풀리고, 항상 들뜬 흥분을 기대하는 여행자에게 헬싱키(Helsinki)는 분명 지옥(Hell)이다. 그러나 청각적, 시각적 자극에 무한정 시달려 온 사람들에게 이 도시는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천국이다.




‘카모메’는 한국어로 갈매기다. 도심 남쪽 바닷가에 사우나와 멋진 테라스를 갖춘 식당에서 헬싱키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즐겼다. 핀란드인만큼 덩치 크고 살찐 갈매기가 손님이 남기고 간 음식이 없는지 호시탐탐 곁눈질하고 있었다. 그 너머로 잿빛 하늘을 담은 바다에 이따금씩 유람선이 지난다. 여름 한 철의 눈부심과 푸르름이 물러간 도시엔 서서히 가을의 스산함이 내려 앉고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평온함, 무(無) 자극의 도시가 벌써 그리워진다.
헬싱키=글ㆍ사진 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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