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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지난번보다 약했는데? 태풍은 등급이 아니라 속도다

입력
2018.09.2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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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항공우주국 나사가 25일 촬영해 26일 공개한 사진으로 국제우주정거장에서 본 24호 태풍 짜미의 눈. 로이터 연합뉴스
미 항공우주국 나사가 25일 촬영해 26일 공개한 사진으로 국제우주정거장에서 본 24호 태풍 짜미의 눈. 로이터 연합뉴스

2009년부터 2년여간 본보 과학면에 연재한 동명(同名)의 칼럼에 등장했던 유아가 어느덧 초등학생으로 자랐다. 아이와 함께 열 살 가까이 먹었지만 여전히 나는 초보 엄마다. 직장까지 다니니 아이에겐 참 미안한 엄마다.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다면, 바로 과학이다. 과학을 취재해온 경험이 육아와 교육에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과학을 좋아하는 엄마가 아이와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를 다시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최근 1년간 잠시 편집국을 떠나 있었다. 그동안 아이와 함께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작은 해안 도시 윌밍턴에서 지내다 지난달 편집국에 복귀했다. 복귀하자마자 허리케인 ‘플로렌스’가 우리가 살던 윌밍턴을 향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까지 나서서 ‘괴물’에 맞서지 말라며 주민들에게 대피를 촉구했다. 허리케인 세기를 분류하는 최고 단계인 5등급으로 세력이 강해질 거라던 플로렌스는 그러나 윌밍턴에 상륙하기 직전 1등급 허리케인으로 도리어 약해졌다. 훨씬 센 3, 4등급짜리 허리케인도 지나간 적 있다는데, 1등급쯤이야 너끈히 버티겠지 싶었다.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바닷물에서 나올 생각을 않던 아이한테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친숙한 해변, 농구장 축구장 야구장 간다고 자주 오가던 도로가 시커먼 물에 잠겨 버렸다. 나무와 건물이 무너졌고, 주민들은 전기와 수도 없이 며칠을 버텨야 했다. 플로렌스가 열대성 폭풍, 열대성 저기압으로 세력이 더 약화한 뒤에도 불어난 물이 케이프 피어 강으로 흘러 들어가 일주일 넘게 침수 위험이 계속됐고, 일부 지역은 고립됐다. 그렇게 1등급 플로렌스는 윌밍턴의 역사에 기록됐다.

1년 전 비슷한 시기엔 허리케인 ‘어마’가 윌밍턴을 향했다. 아이와 함께 대피 가방을 쌌던 기억이 생생하다. 마트에는 물이 동났고, 통조림 매대도 바닥이 드러났다. 주유소마다 ‘매진’ 푯말이 걸렸다. 그런데 노스캐롤라이나주를 정통으로 들이받을 것 같던 어마는 거짓말처럼 방향을 틀어 플로리다주로 내려갔다. 5등급 위력을 가장 오래 발휘한 역사적인 허리케인을 마주하지 않은 행운을 감사하며 아이와 얼싸안았다. 당시 어마의 영향권에 있던 윌밍턴에도 많은 비와 바람이 스쳐 갔지만, 정전도 고립도 없었다.

어마를 기억하는 아이가 TV에서 물에 잠긴 윌밍턴의 거리를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엄마, 플로렌스는 1등급짜리 아냐? 그럼 어마가 더 센 허리케인이잖아. 그땐 윌밍턴이 멀쩡했는데 왜 이번엔 저렇게 잠겼을까?” 이론적으로 보면 허리케인 1등급과 5등급의 차이는 엄청나다. 1등급은 바람 세기가 시속 117㎞ 이상, 5등급은 323㎞ 이상이다. 아이 말대로 윌밍턴은 5등급 어마보다 1등급 플로렌스에 더 큰 피해를 본 것이다.

주된 이유는 허리케인의 ‘속도’에 있다. 외신 등에 따르면 플로렌스는 시간당 불과 3마일(약 4.8㎞)의 빠르기로 움직였다. 어른이 걷는 속도(시속 4~6㎞) 정도밖에 안 된다. 이동 속도가 시속 수십㎞는 되는 다른 허리케인들과 비교하면 완전 ‘느림보’다. 넓은 반경에 엄청난 양의 수증기를 품은 대규모 저기압 덩어리가 아주 느릿느릿 움직이면서 지나는 경로에 ‘물 폭탄’을 쏟아부은 것이다.

이런 현상은 이달 초 우리나라를 거쳐 간 태풍 ‘솔릭’에서도 나타났다. 제주도를 지날 때 솔릭의 속도는 시속 약 4㎞에 불과했다. 그 때문에 제주도에 영향을 미치는 시간이 길어져 침수와 정전 등의 피해도 예상보다 커졌다. 결국 허리케인이나 태풍의 전체 강수량은 등급이 아닌 이동 속도가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1등급이니 5등급이니 하는 허리케인의 단계는 강수량이 아닌 바람의 세기만을 기준으로 구분한 것이다. 먼바다에서 발생한 저기압이 점차 허리케인으로 발달하면서 에너지를 얻으면 그 에너지가 주로 바람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태풍이나 사이클론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허리케인 등급이 낮아졌다고 해서 피해가 줄어들 거라고 예상하면 큰 오산이다. 허리케인의 피해는 바람뿐 아니라 강수량과 속도 등 여러 요인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플로렌스가 상륙하기 직전, 윌밍턴 사는 아이 친구가 대피하던 길에 아이에게 이메일을 보내왔다. “학교 안 가고 여행 떠나는 기분, 한번 상상해보라”고. 알겠다는 듯 키득거리는 아이를 보며 생각했다. 아이 친구의 부모는 시시각각 허리케인 경로를 살피며 밤을 꼬박 새웠을 것이다. 작년 이맘때의 나처럼. 과학이 얼마나 더 발전해야 자연재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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