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응우옌잡은 제국주의 프랑스와 일본,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실질적 범서방)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 정치인이다. 배트남 인민군 총사령관 겸 국방장관으로 베트남전을 승리로 이끈 뒤 독립 통일 베트남정부의 부총리를 지냈으나, 친중파였던 탓에 중-베트남 갈등과 친소파 득세의 80년대 이후 실권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덕에 ‘혁명’ 이후 정치적 타락의 위험으로부터 이념과 소신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었다. 베트남 인민들의 영웅 보응우옌잡(Võ Nguyên Giáp)이 2013년 10월 4일 별세했다.
1911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꽝빈성의 부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중등 과정을 종주국 프랑스에서 유학했지만 현지에서 베트남 독립 학생운동에 연루돼 24년 퇴학 당했고, 베트남청년혁명당에 가입해 학생파업에 가담했다가 징역형을 살기도 했다. 귀국 후 하노이대에 진학해 역사학을 전공하며 공산당을 기반으로 독립운동을 지속했고, 39년 공산당이 불법화되면서 투옥됐다가 중국으로 도피, 미국의 지원을 받던 장제스 체제의 윈난군사학교에서 군사 기초훈련을 받았다. 그의 아내는 프랑스 당국에 의해 체포돼 옥사했고, 처제는 처형 당했다. 그는 44년 귀국, 호치민 휘하의 베트남 해방군을 이끌며 대일본 게릴라전을 지휘했고,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로 장악하려던 프랑스에 맞선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1946~54)을 승리로 이끌었다. 분단 조국의 북쪽 베트남민주공화국 군사령관으로서, 그는 남쪽의 친미 베트남공화국군과 미국 및 우방 참전ㆍ지원국들을 상대로 기나긴 베트남 전쟁(55~75)을 지휘, 역시 승리했다. 정규전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을 동원한 게릴라전의 그 유명한 ‘3不 전략’ 즉 ‘적이 원하는 때에 싸우지 않고, 적이 원하는 장소에서 싸우지 않고, 적이 원하는 방법으로 싸우지 않는다’는 병법은 그를 마오쩌둥(16자전법)에 버금가는 인민전쟁의 영웅이 되게 했다.
하지만 그를 위대하게 한 것은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말년까지 생의 철칙으로 새겨 실천했다는 ‘이공위상(以公爲上ㆍ나보다 먼저 공공의 가치를 생각한다)’의 삶이었다. 2008년 보응우옌잡을 만난 당시 베트남 주재 임홍재 한국대사에게 97세의 그는 대화 끄트머리에 “한국에 거주하는 베트남인들을 잘 도와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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