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법농단 기승전결-3] 일선 재판 지휘한 양승태 사법부’에서 이어집니다.
6월15일 김명수 대법원장의 대국민 담화문 이후 시작된 검찰의 사법농단 관련 수사는 난관의 연속이었다. 재판 거래를 가리키는 새로운 혐의와 의혹들이 제법 나왔지만 법원은 잇달아 영장을 꺾으며 검찰의 강제수사(압수ㆍ수색ㆍ구금ㆍ체포 등 영장이 필요한 수사) 속도를 더디게 했다. 그러자 보니 사법권의 독립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위협하는 중대한 사건 관련 수사임에도, 수사 넉 달째인 24일 기준으로 단 한 명의 구속 대상자도 나오지 않았다.
‘법원행정처 자료 제출’ 놓고 시작부터 삐걱
6월 18일 사건은 서울중앙지검의 정예인 특수1부에 배당됐다. 검찰은 다음날 바로 법원행정처에 자료 제출을 요청했다. 요구 목록에는 대법원이 자체 조사한 컴퓨터 하드디스크 8개 외에도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 등 행정처 간부와 사법정책실 등 일부 실ㆍ국의 하드디스크 일체와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 등이 사용한 법인카드 내역 등이 포함됐다.
수사에 협조할 것이란 김 대법원장의 말과 달리 행정처는 “검토 중”이라는 말만 일주일 넘게 되풀이했다. 행정처는 26일에서야 410개 문건 중 극히 일부 자료만 제공했다. 가장 중요한 증거인 양 전 대법원장 컴퓨터 하드디스크는 이미 지난해 디가우징(강력한 자성을 통한 파일 영구 삭제)을 통해 복구 불가능상태라는 설명과 함께.
이게 정말 사법부가 한 일이라고?
행정처의 비협조 속에서도 검찰의 초반 수사는 빠르게 진행됐다. 양승태 대법원이 벌였던 구시대적 행위 정황도 차츰 드러났다. 그 첫 번째가 상고법원에 반대하던 대한변호사협회(변협) 회장을 압박했다는 정황이었다. 2015년 행정처가 양 대법원장의 숙원 과제인 상고법원에 반대하던 하창우 당시 변협 회장의 탈세 정황을 포착하기 위해 ▦수임 자료를 국세청에 제공하고 ▦특정 언론사에 제공하는 방안을 검토했다는 정황이 수사에서 드러났다.
그리고 이 계획은 실현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어 ▦행정처 간부들이 당시 여당 의원을 만나 ‘상고법원’입법을 로비하고 박 전 대통령과 단독면담을 주선 받은 정황 ▦특정정치인과 언론사 재판 동향을 별도 관리한 정황 ▦원세훈 국정원의 여론조작 사건 소송 진행 상황을 별도 관리한 정황 ▦전교조 법외노조 재항고서 작성에 청와대 개입 의혹 ▦헌법재파소 파견 판사가 헌재 내부 정보를 대법원에 유출한 정황 ▦정운호 게이트 관련 법관 수사 대응 문건 및 검찰총장 압박 모의 문건 등이 검찰 수사로 속속 드러났다.
검찰의 강제수사와 영장의 줄기각
의혹들이 커져가는 상황에서 행정처의 협조를 기대하기 어렵게 되자, 검찰은 강제수사 모드로 전환했다. 시작은 7월21일 임종헌 전 차장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이었다. 하지만 사실상 임 전 차장이 전부였다. 그가 이번 사태의 핵심인물임은 분명했지만 의혹을 실체를 밝히기 위해선 그 윗선에 대한 수사가 필요했다. 하지만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김민수 전 기획조정실 제1심의관 등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은 모두 기각됐다.
법원의 ‘제식구 감싸기’ 논란도 나왔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 무력화’ 의혹과 관련해 검찰이 행정처 국제심의관실과 외교부에 대해 영장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제식구인 행정처는 제외하고 외교부에 대해서만 강제수사를 허용(8월1일)한 것이다. 여론은 크게 들끓기 시작했다.
급기야 돈 문제까지… ‘예산 유용’ 의혹
검찰은 9월6일 대법원 재무담당관실, 예산담당관실을 압수수색 해 양승태 사법부 시절 행정처가 2015년 일선 법원에 배정된 공보 예산을 불법으로 모아 고위법관 격려금에 사용한 의혹을 확인했다. 각급 법원 담당자들에게 공보관실 운영비를 현금으로 쪼개 인출한 뒤 행정처로 돈을 보내라고 지시하고, 사용처에 대해서는 허위 증빙을 갖추라고 한 정황도 나왔다. 대법원은 이렇게 확보한 현금을 2015년 3월 전국법원장 회의에서 각급 법원 법원장들에게 1,000만∼2,000여 만 원씩 배분해 지급했다.
당시 행정처가 양승태 대법원장 입장을 대변하는 기사(헌재를 깎아 내리는 내용)를 직접 작성해 모 언론사를 통해 보도되게 한 뒤, 이 언론사 구독료 명목으로 예산 7,000만원 가량을 집행한 사실도 드러났다. 대법원 관계자들은 이 돈이 당해 국제 유가 하락으로 기름값 부담이 줄면서 남은 예산이라는 증언을 내놓아 예산 전용 의혹은 한층 짙어졌다.
그런가 하면 양 전 대법원장이 재임시절 직접 일선 법원 재판부가 내린 위헌법률심판제청 결정을 취소하게 압박한 정황이 사법농단 수사 과정에서 처음 나오기도 했다. 검찰은 복수의 법원관계자로부터 이러한 진술을 확보하고, 양 전 대법원장을 겨냥한 수사를 단계단계 밟아 갔다.
‘키맨’ 유해용 영장 속속 기각… 검ㆍ법 갈등 최고조
검찰은 9월5일 국정농단 사건에서 비선진료에 연루된 김영재 원장의 부인 박채윤씨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청탁한 특허소송 의혹과 관련해,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현 변호사)의 변호사 사무실을 제한적으로 압수수색하다 재판연구관 보고서 등 재판기록이 무더기로 유출된 정황을 포착했다. 일제 강제징용 민사소송,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재판, 통합진보당 사건 등 재판거래 의혹 사건을 포함해 수만 건에 이르는 것으로 검찰은 판단했다. 다만 문건이 압수수색 대상이 아닌 터라 검찰은 유 변호사한테 “문건을 훼손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고 추가로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했으나 기각됐다. 담당 영장판사는 유 변호사의 문건 유출에 대해 “부적절한 행위지만 죄는 안 된다”며 판단까지 곁들였다.
영장이 기각되는 사이 유 변호사는 관련 자료를 훼손했고,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 직접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정한 책임을 묻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법원이 증거인멸을 방조했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검찰은 유 변호사가 재임 당시 대법원에 계류 중이었던 S여대 소송사건을 수임하고, 대법원 재판연구관과 수차례 접촉한 정황을 추가로 파악했고, 18일 그를 ‘1호 구속영장 청구’대상자로 지목했다. 윗선과의 연결 고리인 그를 구속해 수사의 활로 찾으려는 계획이었다.
구속영장은 예상대로 기각됐다. 이틀 뒤 법원은 변호사법 위반 등 6개 혐의 가운데 변호사법 위반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는 죄가 되지 않거나 범죄 성립 여부에 의문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기각 결정을 내렸다. 영장 발부의 주요 기준이 되는 ‘증거인멸 우려’부분에 대해서도 “(범죄가 아니니)증거인멸 염려가 있다고 할 수도 없다”고 했다. 검찰은 “기각을 위한 기각”이라며 반박했지만, 법원의 벽은 한 없이 공고했다.
김현빈 기자 hbkim@hankookilbo.com
※ ‘[사법농단 기승전결-5ㆍ끝] 윗선 수사 10월 중ㆍ하순 급물살 전망’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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