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여대생 청부살인’ 사건의 주범인 영남제분 회장 부인 윤길자씨. 그는 판사이던 사위와 이종사촌 여동생 하모씨가 불륜관계라고 의심해 하씨를 청부살해한 혐의로 2004년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하지만 복역 겨우 3년 째인 2007년부터 6년 간 교도소에서 나와 병원에서 호화생활을 누리게 된다. 윤씨 주치의였던 박모(59) 세브란스병원 교수의 허위ㆍ과장진단서 덕분이었다. 박 교수는 1만달러를 받고 유방암, 파킨슨증후군, 우울증 등 12개 병명이 적힌 허위ㆍ과장진단서를 발급해준 혐의를 받았다. 대법원은 지난해 11월 벌금 5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하지만 박 교수는 올 3월 말부터 세브란스병원으로 복귀해 진료를 보고 있다. 죄는 인정됐지만, 의료법 상 의사 면허는 유효하기 때문이다. 의료법에 따르면 형법상 허위진단서 작성으로 죄가 인정된 의료인의 면허는 ‘금고 이상의 형’을 받아야만 취소가 가능하다.
#. 최근 부산에서 의료기기 영업사원에게 대리수술을 맡겨 환자를 뇌사에 빠트려 충격을 줬던 의사(46) 역시 지난 7일 구속적부심에서 혐의를 인정한다는 이유로 풀려난 후 17일부터 진료를 재개했다. 형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정부가 그의 면허를 정지할 수 있는 법적 근거는 없기 때문이다. 검찰이 기소를 해야 영업정지 3개월 처분을 할 수 있다는 게 해당 지자체의 설명이다.
대리수술, 허위 진단서 발급, 환자 성추행 등 용납하기 힘든 범죄를 저지른 의료인들이 버젓이 병원에서 진료를 하는 사례가 잇따르며 의료법 개정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0일 의료계에 따르면 보건복지부 장관이 의사면허를 취소할 수 있는 주요 요건은 매우 까다롭다. ▦정신질환자ㆍ마약중독자ㆍ금치산자 ▦자격 정지 처분 기간 중 의료행위를 하거나, 3회 이상 자격 정지 처분을 받은 경우 ▦의사 면허증을 빌려준 경우 ▦일회용 주사 의료용품을 재사용해 사람의 생명ㆍ신체에 중대한 위해를 발생케 한 경우 등이다. 변호사나 공인회계사, 세무사와 같은 다른 전문직군이 횡령ㆍ업무상과실치사상 등 일반 형사범죄로 금고형 이상을 선고 받으면 관련 자격이 취소되는 것과 달리, 의사 면허는 이 같은 범죄에도 영향이 없다. 형법 위반에 따라 의사 면허취소가 가능한 경우는 ‘허위진단서 작성, 위조사문서행사, 낙태, 허위진료비청구 사기 등 의료 관련 법률 위반으로 금고형 이상을 선고 받았을 때’로 매우 제한적이다.
이에 비윤리적인 의료인이 면허를 유지한 채 다시 현장에 복귀, 또다시 피해자를 내는 일까지 발생하고 있다. 2014년 가수 신해철씨 위축소술 사망사고로 기소됐던 의사 강모(48)씨가 대표적이다. 그는 올해 1월 2심에서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 받아 법정 구속(5월 대법원 징역 1년 확정)되기 전인 2015년 위축소 수술을 집도하다 또다른 사망자를 냈다.
면허가 취소되더라도 어렵지 않게 재발부 받을 수 있다는 점도 문제다. 의료법에 따르면 복지부 장관은 면허 취소의 원인이 된 사유가 없어졌거나 잘못을 뉘우쳐 개선여지가 있을 때에는 면허를 재교부할 수 있다. 복지부에 따르면 2013년부터 이날 현재까지 접수된 재교부 신청은 총 41건으로, 이 가운데 2012년 내연녀에게 프로포폴을 투여하다 숨지자 시신을 유기한 김모씨 1명을 제외한 40명이 모두 승인을 받았다. 2011년 한 대학병원 입원실에서 환자에게 전신 마취제를 투약하고 성추행 한 의사도 승인 대상에 포함됐다.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중대한 비윤리적 의료행위로 인명사고 등을 낸 의사에 한해 형 확정 전까지 면허를 일시 정지하고, 실제 유죄가 인정될 경우 자격 취소 여부를 적극적으로 검토할 수 있도록 법개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김치중 기자 cj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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