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엔 고향엔 못 간다는 핑계 대기 바빴는데, 9년 만에 처음으로 마음 편히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희생자를 기리는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 분향소를 정리하던 19일, 분주한 사람들 사이에서 만난 해고 근로자 강주성(49ㆍ가명)씨는 긴장이 채 풀리지 않은 얼굴에 슬그머니 미소를 띄웠다. 스물다섯 살의 나이에 쌍용차에 입사해 15년간 ‘뼈 빠지게’ 일한 강씨에게 2009년 5월 회사는 느닷없는 해고통지서를 보냈다. 그로부터 9년, 어느덧 쉰 살을 목전에 둔 중년이 돼서야 그는 다시 일터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 강씨는 “복직이 결정되고 혼자 미리 경북 의성에 있는 부모님 산소를 찾아 시원하게 벌초도 했다”며 “이번 추석에는 가족들과 함께 찾아 뵐 것”이라고 했다.
9년 전 회사의 일방적인 정리해고 명단(2,646명)에 이름을 올린 순간 강씨의 삶은 180도 달라졌다. 지각이나 결근 한 번 없었고, 고과점수를 못 받았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나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씨는 억울하니 싸워야 하지 않겠냐는 동료들의 말에 고민 끝에 파업에 참여했고, 결국 회사에서 내쫓겼다.
딸린 가족들을 위해 곧장 취업전선에 나섰지만 나이 마흔에 새 직장을 얻는 일은 쉽지 않았다. 특히 ‘쌍용차 해고자’라는 주홍글씨를 달고서는 더 그랬다. 강씨는 “면접 때 분위기가 좋다가도 경력을 알고 나면 ‘전화를 주겠다’고 하곤 감감 무소식이었다”고 전했다. 일용직을 전전하던 그는 5년 전부터 지인의 소개로 건설현장에서 전기시공 일을 시작했다. 강씨는 “변변치 않은 형편에 결혼식도 제대로 올리지 못한 아내와 어린 아들 셋을 두고 전국을 떠돌며 여관방 생활을 했다”고 털어놨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무엇이 가장 떠오르냐는 질문에 강씨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기억하기 싫은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해고 당시 초등학생이던 큰 아들은 올해 대학생이 됐다. 서울권 대학에 합격했던 아들은 스스로 포기하고 집 근처 경기 평택의 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들어갔다. 강씨는 “서울에 가면 방도 거기에 얻어야 하고 돈이 많이 들어가니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라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학에) 보내줄 수 있는데…”라고 못내 미안해했다. 무너지려 할 때마다 그를 버티게 한 것은 가족들이다. “여기서 포기하면 아이들이 나중에 사회생활을 할 때 보고 배운대로 할 것 같았다”고 했다. 그렇지만 워낙 눈물이 많은 아내를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진다. 강씨는 “결혼식을 나중에 하자 했는데 파업이 시작돼 미루고 미루다 보니 어려워졌다”며 “아들 셋을 혼자 키워낸 아내는 이날까지 나보다 더 힘들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해고자 119명 전원의 복직이 결정됐지만, 마음의 생채기는 남았다. 그들을 향해 쏟아졌던 ‘빨갱이’ ‘귀족노조’ 낙인은 주변인들과의 사이도 멀어지게 했다. 강씨는 “노가다를 뛰면서 현장 사람들과 술을 마시다가도 쌍용차 얘기가 나오면 ‘잘못했으니 잘렸겠지’라고 하더라”고 했다. 쌍용차 관련 기사에 달리던 부정적인 댓글에 세상 사람 모두가 자신을 욕하는 것만 같았다고 그는 털어놨다.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는 것조차 두려운 일이 됐다.
그래도 강씨는 이제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를 품는다. 사실 그는 희망고문이 될까 복직 합의 소식을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강씨는 “뉴스를 보고 (가족들에게) 먼저 전화가 왔다”며 “큰 아들이 ‘아버지 복직됐다, 앞으로 행복할 일만 남았다’고 하더라”고 했다. 지인들에게 ‘이제야 사정을 알았다, 미안하다’는 연락이 오기 시작한 것도 위안이 된다고 그는 말했다. 그에게 복직을 하게 되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을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강씨는 “가족과 다 함께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다. 9년 내내 애타게 그렸던 일상으로의 복귀다.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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