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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미국 요구 ‘현재 핵’ 신고ㆍ폐기는 북미협상 빅딜 카드로 남겨

입력
2018.09.19 21:00
수정
2018.09.19 22:51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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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남북 정상 간 비핵화 관련 합의 그래픽=신동준 기자
역대 남북 정상 간 비핵화 관련 합의 그래픽=신동준 기자

공은 다시 미국으로 넘어갔다. 이미 비핵화 의지와 시한을 밝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9일 추가 제시한 대미(對美) 제안은 실행 방법론이다. 보상 없이 핵ㆍ미사일 실험을 스스로 그만둔 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핵물질 생산 시설까지 닫아줄 테니 대북(對北) 군사 위협을 이만 거둬달라는 것이다.

‘9월 평양공동선언’ 제5조 1항에는 ‘북측은 동창리 엔진 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를 유관국 전문가들의 참관 하에 우선 영구적으로 폐기하기로 했다’고 적시됐다. 아울러 김 위원장은 선언문 서명 직후 기자회견에서 “조선반도를 핵무기도, 핵 위협도 없는 평화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 적극 노력해 나가기로 확약했다”고 했다. 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가 전언이 아닌 육성(肉聲)으로 천명된 건 처음이다. 4월 판문점 정상회담 당시에는 김 위원장 입에서 비핵화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김 위원장이 성의를 보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북측은 미국이 6ㆍ12 북미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라 상응조치를 취하면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추가적인 조치를 계속 취해나갈 용의가 있음을 표명했다’는 내용의 선언문 5조 2항에 대해서도 청와대는 획기적 합의로 자평한다.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영변 핵시설 폐기 의지를 북한이 밝힘으로써 한반도 비핵화는 ‘북핵 불능화’라는 실천적 단계에 돌입했다”고 말했다.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인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도 “‘미래 핵’ 활동만 중단하면서 미국의 현재적 보상을 요구하는 북한과 ‘현재 보상을 원하면 현재 것에 대해 구체적 행동을 취하라’고 촉구하는 미국 간에는 인식적 괴리가 있었던 게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현재 핵’의 기본이 되는 영변의 플루토늄ㆍ고농축우라늄(HEU) 생산 시설을 영구 폐기할 수 있다는 첫 용의 표명을 북한한테서 문 대통령이 받아냈다는 건 의미가 크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19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평양공동선언 합의서에 서명한 후 발표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19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평양공동선언 합의서에 서명한 후 발표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다만 신뢰 형성을 위한 ‘무상 양보’는 핵ㆍ미사일 실험 중단과 풍계리 핵실험장 및 동창리 엔진 시험장 폐기 같은 ‘미래 핵’ 포기까지만이라는 게 북측의 단호한 입장이다. 다시 말해 플루토늄ㆍHEU 등 핵물질 생산을 동결하는 ‘현재 핵’ 포기부터는 공짜로 못하겠다는 것이다. 대가가 종전(終戰)선언이다. 문 대통령을 수행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선언 직후 취재진에 “(상응조치로) 종전선언을 포함한 여러 가지 방안들이 검토될 수 있다”고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폼페이오 장관 방북 당시 종전선언 조건으로 내건 핵무기ㆍ핵물질ㆍ핵시설 목록의 신고는 북한으로선 받기 어려운 비핵화 조치 카드라는 게 중론이다. ‘현재 핵’ 포기와 종전선언 교환으로 신뢰가 쌓인 뒤에야 북한이 비로소 내놓을 수 있는 조치여서다. 믿지 못하는 상대에게 자신들의 핵 역량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핵 리스트를 준다는 게 워낙 위험한 일인 데다, 경험상 신뢰 없이 신고해 봐야 협상이 진전되기는커녕 파탄 나기 십상이라는 게 북측의 선(先) 종전선언 요구 논리였다.

불가피하게 북한은 종전선언 수위를 낮추는 고육책을 내놓은 상황이다. 5일 방북한 대북 특사단에게 종전선언은 한미동맹ㆍ주한미군과 상관없다고, ‘정치적’ 선언일 뿐이라고 김 위원장이 선을 그었다. 이날 합의를 보면 북한은 일단 ‘현재 핵’포기라는 문 대통령 중재안을 일정 부분 수용한 모양새다.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 외 추가 조치가 가능함을 시사하기도 했다.

선언에 포함되지 않은 남북 정상 간 이면 구두 합의 가능성도 작지 않다. 정 실장은 “공동선언 내용 이외에도 많은 논의가 있었다”며 “논의 결과를 토대로 내주 초 뉴욕 한미 정상회담에서 북미 비핵화 협상도 좀 더 속도를 낼 수 있는 방안들에 관해 양 정상 간의 심도 있는 논의가 가능해졌다”고 평가했다.

문 대통령 중재안을 수용할 경우 트럼프 대통령은 대북 대화 재개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폼페이오 장관이 다시 방북해 성과를 갖고 올 경우 2차 북미 정상회담이 가시권에 들어온다. 미 중간선거가 11월이어서 10월 중순 전에 약속 형태의 ‘단계적 핵 신고’(북)와 ‘연내 종전선언’(미) 교환이라는 합의가 도출될 수 있다. 남ㆍ북ㆍ미ㆍ중 4자 종전선언을 신호탄으로 핵 신고 및 초기 비핵화 실천과 반대급부인 평화협정 체결 방안을 논의하는 북미 ‘워킹 그룹’이 연내 가동되기 시작하는 게 최선의 시나리오다.

물론 신중론이 없지 않다. 박원곤 한동대 교수는 “북한이 말한 동창리 엔진 시험장 폐기 ‘참관’의 뜻이 미국이 말하는 ‘검증’이 아니고, 북측의 미공개 양보도 없다면 미국이 중재안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은 “북한 비핵화 과정을 100으로 보면 현 단계는 5도 안 된다”며 “북한이 ‘살라미 전술’(비핵화 과정을 잘게 쪼개 최종 단계 도달 시기를 최대한 늦추는 술책)을 구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박세인 기자 sane@hankookilbo.com

류호 기자 ho@hankookilbo.com

평양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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