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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국대ㆍLG’ 일으킨 봉중근 재활 중단 은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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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국대ㆍLG’ 일으킨 봉중근 재활 중단 은퇴한다

입력
2018.09.19 06:06
수정
2018.09.19 07:38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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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봉중근. LG 제공
LG 봉중근. LG 제공

한국 야구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봉중근(38ㆍLG)이 야구공을 내려 놓는다. LG 관계자에 따르면 봉중근은 최근 구단과 상의 끝에 파란만장했던 선수 생활을 마감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6월 28일 어깨 수술을 받고 1년이 넘게 재활에 몰두해 왔지만 더딘 회복 속도에 한계를 느껴 은퇴 결심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봉중근은 ‘초고교급’ 선수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3번타자로 활약하며 신일고를 전국 최강으로 올려 놓은 그는 2학년을 마친 1997년 미국프로야구 애틀랜타에 입단해 투수로 전향하면서 2002년 메이저리그 무대까지 밟았다. 신시내티로 트레이드된 2004년까지 통산 7승을 올린 그는 2004년 어깨 수술 후 빅리그 재도전의 미련을 접었고, 연고팀 LG의 삼고초려에 2007년 국내 유턴을 택했다. 그리곤 2008년부터 선발로 3년 연속 두 자릿수 승, 2011년 팔꿈치 수술 후 2012년부터는 마무리로 변신해 3년 연속 20세이브 이상을 올렸다. 2013년에는 구단 역대 한 시즌 최다 세이브 기록(38세이브)도 수립하며 LG를 11년 만의 포스트시즌으로 인도했다. 2007년부터 2016년까지 10년간 봉중근은 팀 내 투수 WAR(대체선수 승리기여도)에서 25.02로 단연 1위다. 통산 성적은 321경기에 등판해 55승 46패 109세이브 2홀드 평균자책점 3.41.

봉중근을 설명할 때 태극마크를 빼 놓을 수 없다. 신시내티 소속이던 2006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때 처음 성인 국가대표에 뽑혀 4강 신화에 일조한 그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09년 제2회 WBC는 전국구 스타로 올라선 무대였다. 일본전에만 3차례 등판하는 등 4경기(선발 3경기)에서 17.2이닝을 던지며 2승에 평균자책점 0.51의 눈부신 성적으로 준우승의 주역이 됐다. 당시 스즈키 이치로에게 굴욕을 안긴 날카로운 견제도 화제가 되면서 ‘일본 천적’으로 떠오른 봉중근에겐 안중근 의사를 빗댄 ‘봉의사’란 별명이 생겼다. 비록 2년 자유계약선수(FA) 계약 후 등판하지 못하고 유니폼을 벗게 됐지만 LG 암흑기의 희망이자 부활의 중심이었고, 한국 야구를 일으킨 기둥이었다.

끝내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봉중근은 지난해 4월 30일 1군 복귀를 앞두고 등판한 두산과 퓨처스리그 경기에서 어깨 인대를 다쳐 고심 끝에 수술 후 1년 재활 판정을 받았다.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함께 한 류중일 감독이 올 시즌부터 지휘봉을 잡아 복귀 의욕도 컸지만 적지 않은 나이에 세 번째 수술과 재활의 벽은 너무 높았다.

고인이 된 아버지 생전에 지극정성의 효심이 널리 알려졌던 그는 선후배는 물론 팬을 대하는 심성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 선수였다. 봉중근은 얼마 전까지도 지인들에게 “과분한 사랑을 준 팬들 앞에서 마지막으로 한번이라도 공을 던져보고 싶다”며 사이드암으로 투구폼까지 바꿔 안간힘을 썼던 것으로 전해진다.

성환희 기자 hhs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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