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포는 ‘영광굴비’의 본고장으로 추석 대목이면 늘 주목받는 곳이다. 똑같은 참조기라도 법성포 주민들의 손을 거쳐야 비로소 제대로 된 굴비로 대접받는다. 조기가 굴비로 불리는 연유는 고려 인종 때 척신 이자겸(?~1126)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법성포로 귀향 온 이자겸이 조기의 맛을 보고 소금으로 간을 해 말려 진상했는데, 이때 임금에 대한 충정과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뜻으로 ‘굴비(屈非)’라 이름했다고 전한다. 짚에 엮어 걸어 놓으면 활 모양으로 구부러지기 때문에 굴비로 불렀다는 말도 있다.
영광굴비가 밥도둑으로 유명해진 또 다른 이유는 법성포의 자연과 기후조건 때문이다. 법성포는 서해바다 물길이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온 지점에 자리 잡았다. 포구 앞까지 갯벌이 형성돼 있지만 바닷가 특유의 비린내가 나지 않을 정도로 깨끗함을 자랑한다. 산바람 바닷바람이 적당히 섞여 조기를 말리는 과정에서도 파리가 꼬이지 않는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집집마다 축적한 손맛이다. 2~3년간 간수가 빠진 국산 천일염으로 간을 하기 때문에(지역에서는 ‘섶간’이라고 표현한다) 담백한 맛을 자랑한다. 소금물로 간을 하는 다른 지역과 차이점이다. 담그는 사람에 따라 장 맛과 김치 맛이 다르듯, 굴비를 만드는 방법은 거의 동일하지만 집집마다(지금은 업체마다) 굴비 맛에 미묘한 차이가 나는 것도 특징이다.
녹차 우린 물에 밥을 말아 반찬으로 먹는 보리굴비는 냉장고가 없던 시절의 보관 방법에서 유래했다. 탈곡한 보리를 보관하던 독에 섶간을 한 조기를 묻어 놓으면 오랫동안 상하지 않고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 식당에서 흔히 보리굴비라고 내놓는 것은 대부분 참조기가 아니라 덩치가 큰 중국산 부세다. 법성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데 굴비는 국산, 부세는 중국산이라고 명확하게 원산지를 표시하고 있다. 참조기 어장도 예전에는 무안 함평 영광 앞바다를 이르는 칠산바다였지만, 지금은 어획량이 줄어 멀리 추자도나 홍도 앞바다에서 주로 잡는다.
서해 물길이 휘감아 들어온 포구에는 뻘 밭에 고기잡이배가 처연하게 올려져 있고, 가게마다 줄줄이 엮은 굴비가 매달린 모습이 추석을 앞둔 법성포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포구 옆 난전에서는 요즘 한창 제철인 꽃게가 대세다. 갯벌로 눈길을 돌리면 칠게, 농게, 짱뚱어가 파놓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질펀하게 살아 숨쉬는 바다다. 가까이 다가가면 뻘을 돌아다니던 게들이 작은 발소리에도 말 그대로 ‘게 눈 감추듯’ 제집으로 숨어든다. 움직임을 멈추고 한참을 기다려야 다시 머리를 내밀고 먹이를 먹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법성포 뒷산이라 할 수 있는 숲쟁이공원에 오르면 마을을 휘감은 물길과 누렇게 벼가 익어가는 건너편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숲쟁이는 조선 중종 때 축조한 법성진성의 일부로 느티나무와 팽나무 등 100년이 넘는 거목들이 아담하게 숲을 이룬 곳이다. 말하자면 ‘숲으로 이루어진 성’인 셈인데, 2006년 한국의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숲쟁이공원에서 ‘백제불교최초도래지’까지는 산책로로 이어진다. 불교도래지는 법성포와 서해가 연결되는 길목에 공원처럼 꾸민 시설이다. 백제에 불교를 전한 마라난타의 고향인 간다라 양식의 건축 개념을 도입한 상징문을 지나면 간다라유물관과 한옥 양식의 부용루가 나오고, 법성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산꼭대기에 사면대불상(四面大佛像)이 우뚝 서 있다. 건물 외형이 흔히 보는 한국의 전통 사찰과는 사뭇 달라 작은 인도 왕국으로 소풍을 온 느낌을 받는다. 포구 쪽에서는 엘리베이터로 대불 앞까지 쉽게 오를 수 있다. 입장료는 없지만 곳곳에서 증축 공사를 하고 있어 조금은 어수선한 게 흠이다.
풍요로운 칠산바다, 그리고 노을전시관
법성포에서 빠져 나와 영광대교를 건너면 드라이브 코스로 좋은 백수해안도로가 이어진다. 갈매기나 쉬어갈 만큼 조그맣고 한적한 모래미해변을 지나면 약 6km 해안도로 전 구간이 절벽이어서 어디서나 바다 전망이 시원하다. 도로 곳곳에 주차장이 마련돼 있고, 2.3km 구간에 목재 산책로를 조성해 짧은 구간 걸어보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다. ‘백수(白岫)’라는 이름에서 실업자를 먼저 떠올리는 이들이 많겠지만, 실제는 해안과 맞닿은 구수산의 아흔아홉 봉우리를 뜻한다. 일백 백에서 하나가 모자랄 정도로 풍광이 뛰어나다는 뜻이겠다.
백수해안도로가 특히 자랑하는 것은 해질 무렵 낙조와 노을이다. 망망대해만 펼쳐진다면 바다가 다소 맨송맨송할텐데, 수평선 언저리에 크고 작은 섬들이 걸려 시선을 잡는다. 석만도, 안마도, 횡도, 오도, 칠산도 등이 그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작은 칠산도의 이름을 따 이곳을 ‘칠산바다’라 부른다. 신안 임자도에서 부안 위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 칠산바다에 해당하는데, 1960년대까지만 해도 조기 황금어장으로 수백 척의 배가 성황을 이루던 곳이었다. ‘칠산바다에 돈 실러(실으러) 가세’라는 뱃노래가 있을 정도고, ‘사흘 벌어 1년 먹고 산다’는 말이 떠도는 전설의 바다였다. 물에 잠겼다는 칠산마을 전설까지 간직한 곳이지만, 지금 칠산도는 사람대신 괭이갈매기, 노랑부리백로, 저어새 번식지로 더 알려졌다. 백수해안도로 중간지점에 세운 ‘칠산정’에 오르면 섬이 더 또렷하게 보인다.
칠산정에서 조금 남쪽에는 ‘영광노을전시관’이 세워져 있다. 이 넓은 바다와 하늘에 번지는 노을이면 충분하지, 전시관이 왜 필요할까 의아하다. ‘…파장이 짧은 색들은 먼 곳에서 산란돼 사라지고, 파장이 긴 붉은색이 우리 눈에 보이게 된다. 이것이 노을이다.’ 전시관의 설명처럼 건조하고 멋없는 노을을 보려고 먼 길을 올 사람이 있을까.
그날도 전시관 앞 하얀 등대 주변에는 해가 지는 시간에 맞춰 여행객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흐리거나 비가 올 거라는 예보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기대를 접지 않은 눈치다. 칠산도 언저리를 비춘 햇살에 설레던 것도 잠시, 바다와 하늘은 끝내 먹구름에 묻히고 말았다. 허전함에 다시 전시관으로 들어갔다. 문학 속 노을, 영상 속 노을, 사진 속 노을로 아쉬움을 달래 보지만, 목까지 차오르는 갈증은 끝내 채워주지 못했다. 결국 고화질 모니터 속 노을을 배경으로 1,000원짜리 기념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네모난 액자 속엔 박제된 노을이 불타고, 먹구름 낀 칠산바다에서 여행자는 속 타고.
영광=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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