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남북 정상회담의 의제 가운데 가장 핵심은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실천적 방안 협의’이다.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은 17일 “과거 두 번의 정상회담과 달리 이번에는 비핵화라는 무거운 의제가 회담을 누르고 있다”고 부담감을 토로했다.
청와대는 남북ㆍ북미 관계의 ‘선순환’을 말하지만 북미관계가 남북관계를 결정한다는 게 냉정한 현실 인식이다. 실제로도 가을 수확을 염두에 두고 봄에 파종한 경제협력 의제들을 남측 정부가 이번에도 뒷전에 둘 수밖에 없었던 건, 여전히 시퍼런 미국의 대북 제재 서슬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서다.
더 다급한 편은 미국보다 북한인 듯하다. 비핵화 선택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북측 주민들의 의구심을 불식하려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하루바삐 ‘경제 건설 총력 집중’ 노선의 가시적 성과를 보여야 한다. 올해도 벌써 4분의 3 가까이 지나갔다. “핵ㆍ미사일 실험 중단으로는 부족하다”고 종용한 문재인 대통령이 기대를 걸고 있는 지점이다.
북미 주선자에서 중재자로
‘북미대화 촉진ㆍ중재’라는 이번 평양 회담 목표는 4월 첫 회담 때와 비슷하다. 하지만 난도(難度)는 훨씬 높아졌다. 4월 회담에선 오랫동안 나쁜 사이던 북미 양측을 위해 대화 자리를 만들어주는 주선자 역할이었다면 지금은 그간 불신의 관성이 작용하면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도리어 감정만 더 상한 둘을 화해시키는 게 문재인 대통령한테 부여된 임무다.
액면을 보면 양측의 대립각은 첨예하다. 두 지도자가 내부 정치에 골몰하면서다. 이기동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서로 물건을 거래하는데 미국은 살 물건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니 먼저 물건을 봐야겠다는 태도인 반면, 너무 중요하고 비밀스러운 물건을 내놓은 만큼 대가부터 받지 않으면 보여주는 것조차 곤란하다는 게 북한의 입장”이라고 비유했다. 물건은 비핵화, 대가는 안전보장, 즉 현재 정전(停戰)체제를 대체하는 평화체제다.
비핵화, 선언만으론 안 된다
서로 상대방에게 선(先)행동을 요구하면서 들러붙어버린 북미 간 비핵화ㆍ평화체제 교환 협상을 다시 떼어내기 위한 관건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북한의 비핵화 조치다. 이미 구두로는 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가 여러 경로로 거듭 피력돼 온 만큼 이제는 그 선언을 증명할 실질적 행동이 보고 싶다는 게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 요구다.
물론 김 위원장이 원하는 건 미국이 먼저 대북 적대 행위를 그만두는 것이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5일 “칼을 들고 달려드는 강도 앞에서 일방적으로 방패를 내려놓을 수는 없지 않은가”라며 “종전(終戰)선언은 조선반도에서 핵 전쟁 근원을 들어내고 공고한 평화를 보장하기 위한 출발점”이라고 주장했다.
때문에 문 대통령이 평양에서 할 일은 보증이다. 원로자문단에게 의견을 듣는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도발 중단, 핵실험장 및 미사일 엔진 시험장 폐기 등을 언급하며 “‘미래핵’에 대해 북한이 폐기 조치를 이미 취했지만 현재 보유 중인 핵무기와 핵물질, 핵시설, 핵프로그램을 폐기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면서 “북한은 미국에 상응 조치를 요구하고 있다”고 했다. 이에 문 대통령이 ‘미측으로부터 종전선언을 견인해줄 테니 미래핵 포기에서 한 걸음 진전된 현재핵 포기, 즉 영변 등의 핵물질 생산(플루토늄 재처리 및 우라늄 농축) 시설 동결ㆍ불능화를 수용해달라’는 중재안을 김 위원장에게 내놓을 거라는 관측이 나온다.
그러나 폐기 대상부터 파악해야 비핵화 시간표를 짜고 소요 기간도 가늠할 수 있는 만큼 미측이 진짜 원하는 건 핵무기ㆍ핵물질 등의 빠짐없는 신고라는 게 소식통들 전언이다.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인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는 “7월 초 3차 방북 때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핵탄두 상당 부분의 해외 반출 또는 북한 내 폐기와 함께 북한에 요구한 게 핵 리스트를 신고하고 사찰을 받으라는 것이었다고 워싱턴 측으로부터 들었다”고 전했다.
우물가의 목 마른 사슴 둘
문 대통령의 중재가 먹힐 것으로 낙관하기는 사실 쉽지 않다. 홍현익 세종연구소 외교전략연구실장은 “북한에게 핵 신고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소중한 카드여서 평양 선언문에 구체화하기 어려울 수 있다”며 “미국으로서도 북의 성실성을 검증할 수 있는 조치인 신고 부분이 진전되지 않으면 종전선언에 동의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긍정적인 건 북미 지도자의 공통된 처지다. 김형석 전 통일부 차관은 “판이 깨지는 건 물론 제자리 걸음만 하는 것도 양측 모두에게 실망스런 결과”라며 “어떻게든 진전을 이룰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대북 특사단에게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의 부담을 덜어주려 종전선언의 무게를 한껏 줄인 것도 호재다. 이런 전향적 자세로 미뤄 핵 신고 의향 공표 정도는 가능하다는 전망도 있다. 위성락 서울대 객원교수(전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는 “신고가 아니어도 그 방향으로 간다고만 확신할 수 있다면 우리 정부가 움직일 공간은 확보된다”고 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북미 모두 갈증을 느끼고 있는 만큼 우물가에 데려다 놓으면 물을 마실 공산이 크다”고 했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김정원 기자 garden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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