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심각한 완벽주의자”로 통했다. 오후 8시 공연이 잡혀있어도 굳이 6시간 전에 혼자 연습실에 나왔다. 스스로를 괴롭히고 혹사했다. 어쩌다 실수라도 하면 억울해서 잠을 못 잤을 정도로 자신을 믿지 못했다. 무대는 흠 잡을 데 없었지만, 그의 몸과 마음은 피폐 해져갔다. 결국 사단이 났다. 혹독한 연습의 결과는 성대결절이라는 상처를 남겼다. 마음을 고쳐먹기 시작했다. 자신이 해낼 수 없는 큰 목표를 잡지 않기로, 초인적인 한계에 도전하지 않기로 말이다. 배우 조승우(38)의 이야기다.
최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난 조승우는 “이제는 예전의 욕심들을 내려 놓을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최선을 다했으면 됐다”는 마음으로 바뀌면서 “잠도 잘 잔다”고. 12년 전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를 할 때 생긴 성대결절이 그의 삶을 바꾼 계기가 됐다. 독불장군은 없듯이 주변과의 협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19일 개봉하는 영화 ‘명당’에서도 오래 전 얻은 깨우침을 바탕으로 연기했다. 조승우는 명색이 주인공이지만 도드라지지 않는다.
‘명당’은 땅의 기운을 볼 줄 알고, 그것으로 인간의 운명도 바뀐다고 믿는 천재지관 박재상(조승우)과 왕이 될 수 있는 명당을 차지하려는 세도가들의 대립이 주를 이룬 작품이다. 흥선대원군(지성)과 장동 김씨 일가가 땅을 두고 벌이는 혈투가 ‘명당’의 하이라이트다.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조승우보다 지성과 백윤식 등 주변 인물들에 더 눈길이 간다.
“제가 맡은 역할이 도드라지지 않는 게 사실이에요. 왕가의 자손으로서 욕망을 드러내는 흥선과 왕가를 꿈꾸는 장동 김씨 일가에 초점이 맞춰지는 건 당연합니다. 박재상이 후반으로 갈수록 임팩트가 있는 건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중심을 잡는 데 필요한 역할이 아닌가 싶어요.”
독보적인 존재감보다는 “주변과의 앙상블”을 택한 결과였다. 조승우는 “상대배우들에게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했다. 혼자 돋보이려 과한 에너지를 내뿜는 연기보다 “상대배우들과 교감하는 연기에 더 끌린다”. 최근 연기 행보만 봐도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영화 ‘암살’(2015)에선 독립운동가 김원봉으로 특별출연했고, ‘내부자들’(2015)에선 이병헌 백윤식 이경영 등과 호흡을 맞췄다.
안방극장에서도 다르지 않다. JTBC 드라마 ‘라이프’와 tvN 드라마 ‘비밀의 숲’도 단독 주연이 아니었다. 그는 “배우들과의 교감이 없으면 별 볼 일없는 역할일 뿐”이라고 말한다. ‘비밀의 숲’을 통해 만난 배우 배두나(39)와 유재명(45)은 이제 그에게는 보물 같은 존재다. “연기인지 실제인지 모르게 대사를 읊는 배두나”와의 호흡이 꽤나 잘 맞았다. 제작진이 둘을 “개그 콤비”라고 부를 정도였다. ‘비밀의 숲’과 ‘라이프’에 이어 ‘명당’까지 세 작품을 같이 한 유재명은 이제 “리허설이 필요 없는 사이”가 됐다.
주변을 잘 챙기는 인간미도 조승우의 매력이다. 뮤지컬을 할 때 분장실을 같이 쓰는 배우들의 물건을 잘 정리해주고, 손편지나 메모를 남기며 정을 나누기도 한다. 최근에는 ‘라이프’에 함께 출연했던 이동욱과 이규형, 태인호, 유재명 등에게 마사지기를 사서 선물하기도 했다. “박스에 한 명씩 이름을 써서” 마음을 전했다고 한다. 소소한 관계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듯 보였다. 공연과 영화계를 휘어잡으며 성공한 20대 시절에는 이러한 행복을 누리지 못했다고 한다. “20대를 떠올리면 추억이 하나도 없어요. 대학교 2학년 때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 ‘춘향뎐’(2000)으로 데뷔한 후 쉬지 않고 일만 했으니까요. 한창 놀아야 될 시기에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으니 별다른 추억이 없죠.”
조승우는 ‘춘향뎐’이 한국영화 최초로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면서 데뷔 때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후아유’(2002) ‘클래식’(2003) ‘말아톤’(2005) ‘타짜’(2006) ‘고고70’(2008) ‘불꽃처럼 나비처럼’(2009) ‘퍼펙트 게임’(2011) 등 영화에 꾸준히 출연하면서, ‘지하철 1호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카르멘’ ‘지킬 앤 하이드’ ‘헤드윅’ ‘맨 오브 라만차’ 등 뮤지컬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군대 있을 때가 (그나마) 쉬었다면 쉰 시기”라고 말했다.
한 눈 팔지 않고 꾸준히 자신의 길을 걸으며 어느덧 18년 경력의 베테랑이 됐다. 자만하거나 지칠 만도 한데 그는 “세상에 조금이나마 영향을 줄 수 있는 작품을 하자”며 각오를 다시 다지고 있다. 박재상이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받지 않고 풍수를 봐주는 모습이 ‘명당’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은 대목이었다고. 그는 “우리 시대에도 이런 선한 인물이 많으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했단다.
“배우로서 어떤 사명감이나 주관을 가지고 연기생활을 이어갈까를 생각합니다. 조금이라도 주변에 좋은 영향을 끼치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앞으로도 메시지가 있는 작품을 하고 싶은 게 제 바람이에요.”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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